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시/좋은시 동영상

이해인 시

우리들 이야기 2020. 8. 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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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님의 시 모음

 

◈6월엔 내가
숲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유월
6월엔 내가
빨갛게 목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생명을 향해
하얗게 쏟아 버린
아카시아 꽃타래
6월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욱 살아
산기슭에 엎드려
찬비 맞아도 좋은
바위가 된다 

 

◈가위질
예쁜 色紙도
무늬 고운 헝겊도
쏙닥쏙닥 오리길 좋아했었네
기인 머리채도
결 고운 비단도
나를 자르듯
잘라낼 수 있었지만
칼끝 같은 가위로도
도려낼 수 없는
아득하고 아득한
너를 향해
펼쳐진 마음 

 

◈가을노래 .1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가을노래 .2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있는 친구가 보고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시간 아껴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때마다
한 웅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가을 편지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 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 강물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 -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 방을 밝힙니다.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숲 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이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
마지막으로 아껴 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당신은 내 生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線.
그리고 내 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하십시오.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詩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 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빛 새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께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
나의 사랑이 티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룰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秘法을 들려 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의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時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이의 눈 속에 출렁이는 그림 한 점,
샤갈의 <푸른 장미>.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 속에
조용히 흔들리는 선율, .
내게 이런 모든 것을 느끼도록 해 주신 당신의 크신 얼굴이
더 크게 살아오는 가을.
루오의 그림마다에서 당신의 커다란 눈들이 나를 부릅니다.

오늘은 길을 떠나는 친구와 한 잔의 레몬차를 나누었습니다.
이별의 서운함은 침묵의 향기로 차(茶) 안에 녹아 내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서로의 평화를 빌어 주고 있었습니다.
정든 벗을 떠나 보낼 때는 언제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헤어질 때면 더욱 커 보이는 그의 얼굴.
손 흔들 때면 더욱 작아 보이는 나의 얼굴.

새벽에 성당 가는 길엔 푸른 색 나팔꽃 한 송이와 꼭 마주치게 됩니다.
그 꽃이 나를 바라보듯이 내가 그 꽃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유순하고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게 하여주십시오.

귀뚜라미 노래소리에 깊어 가는 가을밤.
내 피곤한 육신을 맨땅에 눕히듯이 작은 나무 침대 위에 눕히면,
오랜만에 달고 싱싱한 사탕수수 같은 나의 꿈과 잠.
꿈에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긴 여행을 합니다.
꿈꾸는 것조차도 당신 안에선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보름달 속에 비치는 당신의 빛나는 모습.
달처럼 차고 또 기우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달빛에게 세례받은 하얀 박꽃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당신의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달이 되어 뜰때까지.

가을엔 가장 작은 들꽃의 웃음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 몰래 앓고 있는 내 이웃의 작은 아픔까지도 깊이 이해하며
그를 위한 나의 눈물이 기도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5년 전부터 내가 아껴 쓰던 열두 빛깔의 색연필을 깍아 이글을 씁니다.
이 연필들이 나의 손에 길들어져 조금씩 닳아 가듯이
나 또한 당신에게 길들어지며 담백한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습니다.

가을엔 내가 잠을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좀더 참을 걸 그랬지, 유순할 걸 그랬지.'
남을 언짢게 만든 사소한 잘못들도 더 깊이 뉘우치면서
춧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만,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가을밤.
당신 안에 만남을 이룬 이들의 착한 얼굴들을
착한 마음으로 그려 봅니다.

가을 길에 줄지어 선 코스모스처럼
내 마음 길에 수없이 한들 대는 시심(時心)의 꽃잎들.
'따지 말고 그냥 두면 더한 아름다움일 것을' -
이러한 생각이 시 쓰는 나를 괴롭힐 때가 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가을엔 지는 노을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조심스런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저 노을처럼 짧게 스쳐 가는 황홀한 순간과, 보다 더
긴 안타까움의 순간들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러나 오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오늘도 저 노을처럼 오십시오.

때로는 이해할 수 업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이 가을엔 꼭 찾아 얻게 하소서.
꽃이 죽어서 키워낸 열매, 당신이 죽어서 살려낸 나,
가을엔 이것만 생각해도 넉넉합니다.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우산도 채 받지 않고 길을 가는 이들의 적막한 얼굴 속에서
나는 당신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삶은 비애를 긋고 가는 한 줄기 가을비일까」
혼자서 나직히 뇌어보며 오늘은 더욱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닮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한(恨)과 눈물이 서린 듯한, 그러나 나를 낳아 준 모국의 정든 산천.
하루도 근심이 끊이지 않는 그녀의 쓸쓸한 이마를 보면 눈물이 핑 돕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서도 이미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나의 이웃들을
지금은 그 아무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힘이 없어 보입니까.

오늘은 빨갛게 익은 동백 열매 하나 따 들고 언덕을 오르며,
당신을 향한 나의 그리움 또한 이 작은 열매처럼 하도 잘 익어서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내 하얀 머리수건 위에 올려 놓은 바람.
그리고 손에 쥐어 보는 유리빛 가을 햇살.
잠자리 날개의 무늬처럼 고운 설레임으로
삶을 더욱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당신의 가을 햇살 -
잊지 못합니다.

사랑할 때 우리 모두는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기다림에 깊이 물들지 않고는 어쩌지 못하는 빨간 별,
별과 같은 가슴의 단풍나무가 되나 봅니다.

버리기 아까워 여름 내내 말린 채로 꽃아 둔 장미꽃 몇 송이 가 말을 건네 옵니다.
"우린 아직 죽은 게 아니어요."
그래서 시든 꽃을 버리는 일에도 용기가 필료함을 깨닫는 아름다운 가을의 소심증.

세수를 하다 말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워서 들여다보는 대야 속의 물거울.
'오늘은 더욱 사랑하며 살리라'는 맑은 결심을 합니다.
그 언제가 될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세수도 미리 기억해 보며,
차갑고 투명한 가을 물에 가장 기쁜 세수를 합니다.

늦가을, 산 위에 올라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깊이 사랑할수록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며 사라지는
무희들의 마지막 공연을 보듯이,
조금은 서운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봅니다.
매일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지켜 보듯이 -

노을을 휘감고 묵도하는 11월의 나무 앞에 서면
나를 부르는 당신의 음성이 그대로 음악입니다.
이별과 죽음의 얼굴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가을의 끝.
주여, 이제는 나도 당신처럼 어질고 아프게
스스로를 비우는 겸손의 나무이게 하소서.
아낌없이 비워 냈기에 가슴 속엔 지혜의 불을 지닌
당신의 나무로 서게 하소서.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가을이 파 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두레박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여름의 꽃들이 조용히 무너져 내린 잔디밭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새도 즐기는 이른 새벽의 침묵의 향기 -
새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비켜 갔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피곤에 지친 당신을 가을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눕히고,
나는 당신의 혼(魂)속으로 깊이 들어가 오래오래 당신을 잠재우는
가을바람이고 싶습니다.

가을엔 언제나 수많은 낙엽과 단풍의 이야기를 즐겨 듣습니다.
페이지마다 금빛 지문(指紋)이 찍혀 있는 당신의 그 길고 긴 편지들을
가을 내내 읽고 또 읽듯이 -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기도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꽃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길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걸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 길을 가네 

 

 

◈꽃집에서
"어느 꽃을 사겠니?"
"..............."
"어느 꽃을 사겠냐니까?."
"..............."
꽃집에서 들어 가서
꽃을 사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꽃들은 다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이
너무 아름답거든요
향기가 좋거든요
모두 다
내 마음에 들거든요
꼭 한 가지만
골라서 산다는 일은
어쩐지 미안하고
어쩐지 슬퍼 집니다
그래서
꽃집을 슬며시
그냥 나와 버립니다 

 

 

◈나를 부르는 당신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와 올려다 보면
퍽도 높은 산을 내가 넘었구나
건널 때는 몰랐는데
되건너와 다시 보면
퍽도 긴 강을 건넜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만 싶어
다시는
떠나지 않으렸더니
아아, 당신
그래도
움직이는 산
굽이치는 강
나를 부르는
당신

  

◈나무의 마음으로
참회의 눈물로 뿌리를 내려
하늘과 화해하는
나무의 마음으로 선다
천만 번을 가져도 내가 늘 목마를 당신
보고 싶으면
미류나무 끝에 앉은
겨울 바람으로 내가 운다
당신이 빛일수록
더 짙은 어둠의 나
이 세상 누구와도 닮은 일 없는
폭풍 같은 당신을 알아 편할 길 없다
오늘은 엇갈리는 만남의 비극 속에
내일은 열리는가
땅 위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존재의 끝은 당신
편히 잠들 날 없는
가장 정직한 나무의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선다 

 

 

◈나비의 연가
가르쳐 주시지 않아도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향해 날으는
한 마리 순한 나비인 것을
가볍게 춤추는 나에게도
슬픔의 노란 가루가
남몰래 묻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눈멀 듯 부신 햇살에
차라리 날개를 접고 싶은
황홀한 은총으로 살아온 나날
빛나는 하늘이
훨훨 날으는
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임을 가르치는
풀잎들의 합창 

 

 

◈나의 하늘은
그 푸른 빛이 너무 좋아
창가에서 올려다본
나의 하늘은
어제는 바다가 되고
오늘은 숲이 되고
내일은 또
무엇이 될까
몹시 갑갑하고
울고 싶을 때
문득 쳐다본 나의 하늘이
지금은 집이 되고
호수가 되고
들판이 된다
그 들판에서
꿈을 꾸는 내 마음
파랗게 파랗게
부서지지 않는 빛깔
하늘은
희망을 고인
푸른 호수
나는 날마다
희망을 긷고 싶어
땅에서 긴 두레박을
하늘까지 낸다
내가 물을 많이 퍼가도
늘 말이 없는
하늘

 

 

◈낡은 구두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년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 준
고마운 그를 

 

 

◈내일
부르지 않아도
이미
와 있는 너
이승의 어느 끝엘 가면
네 모습
안 보일까
물 같은 그리움을
아직은 우리
아껴 써야 하리
내가 바람이면
끝도 없는 파도로
밀리는 너 

 

 

◈너에게 띄우는 글
사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의 지나가는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로 남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너와 나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너와 나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다.
그래, 이제 더이상 나이기보다는 우리이고 싶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너와 나는
돌아도 끝없는
둥근 세상
너와 나는
밤낮을 같이하는
두개의 시계바늘
네가 길면
나는 짧고
네가 짧으면
나는 길고
사랑으로 못박히면
돌이킬 수 없네
서로를 받쳐 주는 원 안에
빛을 향해 눈뜨는
宿命의 반려 

 

 

◈누군가 내 안에서
누군가 내 안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쓸쓸하고
정직한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목 쉰 채로
나를 부르지만
나는 선뜻 대답을 못 해
하늘만 보는 막막함이여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것일까
그가 나를
아프게 한 것일까
겸허한 그 사람은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고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막막함이여 

 

 

◈당신 앞에 나는
당신 앞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항아리에요
비켜 설 땅도 없는 이 자리에서
당신만 생각하는 길고 긴 밤 낮
나는 처음부터 뚜껑없는 몸이었어요
햇빛을 담고,바람을 담고,구름을 담고
아직도 남아있는 비인 자리
당신만이 채우실 자리
당신 앞에 나는 늘 얼굴없는 항아리
기다림에 가슴이 크는 항아리에요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이웃의 말과 행동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하루의 작은 여정에서
내가 만나는 이의 말과 행동을
건성으로 들어 치우거나
귀찮아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가로막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웃을 잘 듣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임을
내가 성숙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이기심의 포로가 되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듣고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무심함에서
나를 구해주소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못 들은 척 귀막아버리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으니까'
'잘 몰랐으니까' 하며 핑게를 둘러대는 적당한
편리주의, 얄미운 합리주의를 견책하여 주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과 사건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앉아야 할 자리에 앉고
서야 할 자리에 서고
울어야 할 때에 웃고
웃어야 할 때에 웃을 수 있는
민감하게 듣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듣게 하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자신을 잘 듣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를 잘 듣는 사람만이
남을 잘 들을 수 있음을
당신을 잘 듣을 수 있음을
거듭 깨우치게 하소서
선한 것을 지향하는 마음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해
침묵과 고독속에
자신을 조용히 숨길 줄도 알게 하소서
나는 두귀를 가졌지만
형편없는 귀머거리임을 몰랐습니다.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말만 많이 했음을 용서하소서
들으려는 노력으도 아니하면서
당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해
멋대로 의심하고 불평했음을
지금은 뉘우칩니다.
매일매일의 내 작은 여정에서
내 생애의 큰 여정에서
잘 듣고 잘 말하는 이가 되도록
밝고 큰 귀와 입을 갖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웃을 위해
마음의 귀가 크게 열려 있는
성인들의 사랑을 본받고 싶습니다.
말소리만 커지는 현대의 소음과
언어의 공해 속에서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겸손히 듣고 또 듣는
들어서 지혜를 깨우치는
삶의 구도자 되게 하소서. 

 

 

◈마더 테레사께
당신의 눈 속에 들어있는
높고 푸른 하늘을
가까이에서 본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반세기 동안 쏟아부은
당신의 사랑은
캘커타를 넘어 세계로
흘러가고
이제 당신은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순례의 어머니가 되어
먼길을 가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싶어할 때마다
괴로운듯 나직이 말씀하셨지요.
"오 나는 성녀가 아닙니다.
 나를 보고 싶거든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세요"
맨발로 빈 손으로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던
사랑의 어머니여
흠도 티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제 편히 쉬십시요.
아직 어머니를 닮지 못하고
서성이는 저희에게
"오직 사랑만이 전부다"라고
하늘의 별이되어
말씀하여 주십시요. 

 

 

◈말을 위한 기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날마다 나도 모르게
먼지를 마시며 살고
날마다 일어나서
먼지를 쓸며사네.
어디서 오는지
분명치 않은 먼지와 먼지
하얀 민들레 솜털처럼,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지
어느날
나도 한줌
가벼운 먼지로 남게 됨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지 

 

 

◈민들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싶은 얼굴이여. 

 

 

◈바다새
땅에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삭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반지
약속의 사슬로
나를 묶는다
조금씩 신음하며
닳아 가는 너
난초 같은 나의 세월
몰래 넘겨 보며
가늘게 한숨 쉬는
사랑의 무게
말없이 인사 건네며
시간을 감는다
나의 반려는
잠든 넋을 깨우는
약속의 사슬 

 

 

◈별을 보며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 일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봄 아침
창틈으로 쏟아진
천상 햇살의
눈부신 색실 타래
하얀 손 위에 무지개로 흔들릴 때
눈물로 빛어 내는
영혼의 맑은 가락
바람에 헝클어진 빛의 올을
정성껏 빗질하는 당신의 손이
노을을 쓸어 내는 아침입니다
초라해도 봄이 오는 나의 안뜰에
당신을 모시면
기쁨 터뜨리는 매화 꽃망울
文身 같은 그리움을
이 가슴에 찍어 논
당신은 이상한 나라의 주인
지울 수 없는 슬픔도
당신 앞엔
축복입니다 

 

 

◈봄 편지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 오는 봄
진달래 꽃망을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봉숭아
한 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부르심
나의 神은 잠잠하다
바람 속에만 말씀하신다
귀 막아도 들리는
가슴 속 파도 소리
목마르다
목마르다
바람 불면
바람 속에 나는
혼자일 수 없다
해질녘 바다에서
내가 만난 영혼들이
손을 내밀고
끝없이 보채는
당신의 기침 소리
그 소리 비켜
이제는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비밀
겹겹이 싸매 둔 장미의 비밀은
장미 너만이 알고
속으로 피흘리는 나의 아픔은
나만이 안다
살아서도 죽어 가는
이 세상 비인 자리
이웃과 악수하며 웃음 날리다
뽀얀 외롬 하나
구름으로 뜨는 걸
누가 알까
꽃밭에 불밝힌
장미의 향기보다
더 환히 뜨겁고
미쁜 목숨 하나
별로 뜨는 사랑
누가 알까 

 

 

◈비갠 아침
비갠 아침
하나의 태양이
온 세상을 골고루 비춘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듯한
기쁨.
꽃의 죽음으로 태어난
한 알의 사과를
아무런 고마운 마음도 없이 먹어버린 데 대한
조그만 슬픔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어도
대신 아퍼줄 수 없고
그저 눈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뼈아픈 막막함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운다
그리고 조금씩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랑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진다는 것을.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주님,
제가 좀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제 삶의 일과표엔 언제나
당신을 첫자리에 두고서도
실제로는 당신을 첫자리에
모시지 못했음을 용서하소서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 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거나
문을 열고 닫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받으소서
식사하거나 이야기하거나
그릇을 닦거나 걸레를 빠는 것과 같은
일상의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제가 좀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저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익히는 사순절이 되면
잔뜩 숙제가 밀려 있는 어린이처럼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성서와 성인전을 머리맡에 두고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새롭히는 계절
제가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던
가까운 이웃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번도 제대로 기도를 못한 것 같은
절망적인 느낌 속에서도 주님,
기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주소서
제 안에 사제로 살아 계신 당신이
저와 함께 기도해 주심을 믿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사랑도 나무처럼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두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충만의 가을이 있고
눈 속에 발을 묻고
홀로서서 침묵하며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이 있네
사랑도 나무처럼
그런 것일까
다른 이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오늘도 태연한 척 눈을 감는
나무여 사랑이여 

 

 

◈산위에서
그 누구를 용서할수 없는 마음이 들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이야기는 나만이 아는것
세상에 사는동안 다는 말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낼수 없다
꼭 침묵해햐할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산처럼 바다처럼
산을 좋아하는 친구야
초록의 나무들이
초록의 꿈 이야기를 솔솔 풀어내는
산에 오를 때 마다
나는 너에게 산을 주고 싶다
수많은 나무들을 키우며 묵묵한 산
한결 같은 산처럼 참고 기다리는 마음을
우리 함께 새롭히자.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야
밀물과 썰물이 때에 따라 움직이고
파도에 씻긴 조가비들이
사랑의 노래처럼 널려있는
바다에 나 갈 때 마다
나는 너에게 바다를 주고 싶다
모든 걸 받아안고 쏟아낼 줄 아는 바다
바다의 넉넉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우리 함께 배우자.
젊음 하나만으로도
나를 기쁨에 설레이게 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목말라하는 너를 위해
나는 오늘도 기도 한다
산의 깊은 마음과 바다의 어진 마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살아 있는 날은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선물의 집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바닥이 나지 않는 선물의 집
무엇을 줄까
어렵게 궁리하지 않아도
서로를 기쁘게 할 묘안이
끝없이 떠오르네
다른 이의 눈엔 더러
어리석게 보여도 개의치 않고
언어로, 사물로 사랑을 표현한다
마침내는 존재 자체로
선물이 되네, 서로에게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움도 달콤한 선물의 집
이 집을 잘 지키라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준 것이겠지? 

 

 

◈슬픈 날의 편지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 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믿음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도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유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언젠가 이런날이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은
깊은 슬픔입니다.
사랑이 너무많아
잠시도 쉴 틈 없이 삶이 고달파도
누구보다 행복했던 마더 테레사
메마른 세상 곳곳
사랑의 샘을 만들고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
누구에게나 평화의 어머니가 되셨던
마더 테레사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랑의 예수와
이젠 하늘 나라에서
모든 시름 잊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반세기 동안
당신이 뿌려놓은
사랑과 희망의 씨앗들은
당신을 따르는 선교회 수녀들과
당신을 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길이 꽃피고 열매 맺을 것입니다.
겸손과 신뢰가 출렁이던
당신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고
오래된 나무처럼 투박했던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이기심과 욕망을 부끄러워하며
맑고 순한 기쁨만 가슴에 가득한
만남의 순간들을 항상 기억하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그 마지막 말씀을
다시 삶의 지표로 세우고
끝까지 가야할 사랑의 길을
우리도 기쁘게 달려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안녕히 가십시오. 

 

 

◈아름다운 순간들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 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 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끓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어떤 별에게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지만
산에서 하늘을 보면
금방이라도 가까이
제 곁에 내려앉을것 같습니다
다른 별에 비하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이라는 걸
얼른 이해할 수 없듯이
때로는 그안에
먼지처럼 작은 내가 있음을
자주 잊어버리며 삽니다
요즘은 혜성, 목성이 거대한 충돌로
온 세계가 하늘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큰 별과 별, 천체의 부딪침이 신기하고 놀랍듯이
지구에 사는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어느 순간 섬광처럼 부딪쳐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것인가요?
누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그 황홀한 내면의 빛은
소리 없이 활활 타올라
우주를 밝히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할땐 우리도 별이 되고
이미 별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하게 부딪치고도 깨어지지않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별나라에까지 들고 갑니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보름달에게 .2
네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오르면
할 말을 잊는 것처럼
너무 빈틈없이 차올라
나를 압도하는 달이여
바다 건너
네가 보내는
한 가닥의 빛만으로도
설레이누나
내가 죽으면
너처럼 부드러운 침묵의 달로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한 번씩 떠오르고 싶다. 

 

 

◈오늘을 위한 기도
오늘 하루의 숲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가는
끗끗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때는
어느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 모든것에 감사했습니다'

 

◈오늘의 약속
내가 돌보지 못해
墓碑처럼 잊혀진
너의 얼굴
미안하다 악수 나눌 때
나는 떳떳하고
햇살은 눈부시다
슬픔에 수척해진
숱한 기억들을 지워 보내며
내일 향해 그네 뛰는
오늘의 행복
문을 열어라
나는 너를 위해
한 점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
새 옷을 차려입고
떠날 채비를 하는
나의 오늘이여
착한 누이의 사랑으로
너를 보듬으면
올올이 쏟아지는 빛의 향기
어김없는 약속의
내일로 가라

 

◈제비꽃 연가
나를 받아 주십시오
헤프지 않은 나의 웃음
아껴둔 나의 향기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웃을 수 있고
감추어진 향기도
향기인 것을 압니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 속엔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담담한 세월을
뜨겁게 안고 사는 나는
가장 작은 꽃이지만
가장 큰 기쁨을 키워 드리는
사랑꽃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온통 봄빛으로 채우기 위해
어둠밑으로 뿌리내린 나
비오는 날에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작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책을 읽는 기쁨
좋은 책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 향기가 스며들어
옆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한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이 향기에 취하는
특권을 누려야 하리라.
아무리 바빠도 책을 읽는 기쁨을 꾸준히 키원나가야만
우리는
속이 꽉 찬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을 감사하라.
책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 구절로
내 삶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질 수 있음을
늘 새롭게 기대하며 살자. 

 

 

◈촛불
말은 이미
끝났습니다.
순백의 가슴 둘레
불꽃으로 피운 눈물
바람에도 휘지 않는 노을빛 사랑
당신은
내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죽어서도 무덤 없는
고독의 불꽃
소리도 안 들리는 곳에서
승천을 꿈꾸며
태워 온 갈망
당신 위해 준비된 나에게
말은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촛불 켜는 아침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하얀 팔목의 나무처럼
나도 일어섰다
대신 울어 줄 수 없는
이웃의 낯선 슬픔까지도
일제히 불러 모아
나를 흔들어 깨우던
저 바람소리
새로이 태어나는 아침마다
나는 왜 이리 목이 아픈가
살아 갈수록 나의 기도는
왜 이리 무력한가
사랑할 시간마저
내 탓으로 잃어버린
어제의 어둠을 울며
하늘 위에 촛불 켜는 아침
너를 위한 나의 매일은
근심 중에서도 신년 축제의 노래와 같기를 -
그래서 나는
눈무신 언어를 날개에 단
아침 새가 되고 싶었다
햇빛을 끌어내려
젖은 어둠을 말리는 나무 위에
의망의 둥지를 트는
새가 되고 싶었다 

 

◈친구에게
부를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 안에 한 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말을 감추어 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내 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른 기도를
선물로 받아 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모였다가
어느 날은 한 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난보다는 이해의 눈길로 감싸 안는 친구야
하지만 꼭 필요할 땐
눈물나도록 아픈 충고를 아끼지 않는
진실한 친구야
내가 아플 때엔
제일 먼저 달려오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엔
함께 울어 주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엔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고마운 친구야
고맙다는 말을 자주 표현 못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너는 또 하나의 나임을 알게 된다
너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
참을성 많고 한결같은 우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본다
늘 기도해 주는 너를 생각하면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나도 너에게 끝까지
성실한 벗이 되어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해
힘든 때도 있었지만
화해와 용서를 거듭하며
오랜 세월 함께 견뎌 온 우리의 우정을
감사하고 자축하며
오늘은 한 잔의 차를 나누자
우리를 벗이라 불러 주신 주님께
정답게 손잡고 함께 갈 때까지
우리의 우정을 더 소중하게 가꾸어 가자
아름답고 튼튼한 사랑의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들이 춤추며 지나가게 하자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좋은 벗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행복한 이웃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벗이 되자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내 안에서
푸른 가을 하늘로 열리는
그리운 친구야...

 

 

◈플라토닉 사랑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남이란 단어가 맴돌곤 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하겠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진다는 것을. 

 

◈하관
삶의 의무를 다 끝낸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난 상자에 누워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다 한 이야기
못다 한 사랑 대신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언뜻 스쳐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눈물도 성수처럼 맑을 수 있던
노수녀의 마지막 미소가
우리 가슴속에 하얀 구름으로 떠오르네 

 

◈해바라기 연가
내 생애가 한 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쏙아지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않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에서 올올이 뽑는
고운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던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황홀한 고백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 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거대한 밤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江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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