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하느님 사랑/주님의 말씀.나의 생각.

정의로운 사도

우리들 이야기 2021. 10. 17. 08:02

https://youtu.be/P2858URF_iA

 

정의로운 사도

선물인가? 뇌물인가? 보이는 세상에서는 공짜는 없답니다.

이유없이 악한이에게 돈주는 천사는 없듯이 돈은 마귀라

물질이 가는곳은 한번 다시 깊이 새기어야 하며 자리를 파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자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큰 마귀었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마귀의 꼬임에 빠진다는 것을 잘모르는 것은 천사같은

사람인데 천사의 마음을 물질로 유혹하는 마귀는 벌을 받아야 하건만

자리로 다 빠지고 천사들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눈비에

깨끗해지면 남는 것은 사실만 남았습니다.

그러기에 천사도 지혜가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 모 기자가 명절에 선물이 들어왔는데

기사로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에 물질로 마음을 꼬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자랑하더니 선물한 그 사람에게 기사를 잘 써주어야하니

선물이 뇌물이란 것을 알고 명절에 마음만 받고 물질적인 선물은

받지 않으니 마음이 자유로워 지드랍니다.

심지어는 종교도 거룩한 성경의 말씀에서 나오는 정의로운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이들이 있지만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것은 마귀였으니 세상은 공짜가

없다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 지고 죽으신 예수님 율법대로면

정의가 위에 있지만 기득권들이 만들어놓은 율법은 그들를 위한 법이고

정의로운 주님께서는 그 법대로 사시다가 기득권인 바리세파인들에 의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으니 전 세계의 정의로운 사도가 되었습니다. 2021  10 임데레사

 

 

믿음

니체의 신이 죽었다 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안맞으면 니체뿐 아니라 신이 있어? 하며 반문하니 보이지 않기에 신을

자기의 상상대로 말이 되었으며 니체의 '신이 죽었다' 라는 말뜻을 

오늘살아가는 종교인들이 귀담아 듣고 반성해야겠지요.

무조건 악함에서도 기적으로 구해주는 신이 아니고 모두를 위해 자기를

회생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니체의 생각 서로 자기가 믿고 싶은 종교에서

벗어나 종교위 자유자로 논쟁을 끄집어 내면서 문제는 내종교가 옳다고

사상의 초석을 만들려고 하기에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나봅니다.
누구나 믿고 싶은대로 믿는 자유가 있으니 니체가 생각하는 신은 어떤 신인지

모르니 죽은 네체만 알겠지만 세상이 믿음이 점점 없어지니 보이지는

않지만 정의를 믿고 싶기에 인간들의 원래는 양심이 있었는데

보이는 세상에서 경쟁하며 살다보니 더러워지게 물들었지만 마지막 가는길은

잘못 살은것을 후회한다니 이세상에선 무어던지 유통이 기간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신비의 세상은 유통이 없이 무한하니 영원이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아무도 모르기에 그래서 풀지 못하면 신비라고 하지 않나요?

아무도 몰라주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늘이 알고 땅이알고

너와 내가 안다고 진실은 하늘나라 신의 편에 있고 우리 인간은

땅이지만 아담과 신이 손을 잡았듯이 하늘과 땅은 우리의 터전이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부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 그시절에도 인간은 너무도

이런것에 쉽게 굴복하고 알맹이가 없어도 양심을 돈에 팔기에 신이 없다고

니체는 그것을 비판했으니 니체의 종교관을 우리가 평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의 마음이지 그 의 마음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신이 있어 하며 자기의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의 신이었지요.

거룩한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었지만 한번도 내가

세상을 만들었다거나 주인이고 내가 기적을 행하였다 자화자천

안 하셨으며 너의 맏음이라고 하셨으며 생각 한 대로

이루어지었다 하셨으니 믿음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신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오늘날에도 그분을 정의의

사도라고 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이들이 있기에 슬픈일지만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우리가 해석을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듯이 이름을 팔지 말고 그분을 닮는 것이 바로 믿음 성가도

믿음만 있으면 저산도 옮긴다고 하였고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습니다.

가장 세상에서 원하는 사랑이나 물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생명을 살리는 것인데 그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보고

배신이라 하지만 믿는 다는 것은 신뢰기에 무조건 믿으렵니다. 2021  10 

 

1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모세오경

2 <여호수아> <판관> <룻> <사무엘 다윗 상하> <열왕기 솔로몬 상하>

<역대 상하> <에즈느헤> <토빗> <유덧> <에스테르> <마카베오 상하>=역사서

3 <시편> <욥기> <잠언> <코헬렛> <전도서> <아가> <지혜> <집회>=시서 지혜서

4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애가+바룩>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예언서

상선 발악

권력다툼 노예제도 사라진게 아니라 주도권 다툼이

이상한 핑계로 다시 악한 계획으로 속이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더러워진 세상을 새롭게 정화하려 하였는데

다시 더러운 물이 고이기 시작하였으니 멈추지 않고 점점

자신의 이익이 인간의 욕망으로 세도되어 그들이 유익한 제도를

만들며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들의 욕망은 힘과 자리였습니다.

 

인간이 창조

하느님은 창조주 인간은 피조물 하지만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이건만 생각이 다르기에 보이는 세상에서

안보이는 세상을 과학으로 풀려하니 하늘나라는 신화도 되고 신비.

하느님의 윤리나 교리를 누가 넘어서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 닭도 알이 부화해서 닭이 되듯이

이세상 모든 것은 씨를 뿌리고 잘 가꾸어진 대로 열매가

맺었으니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책임지라고 만드셨는데 우리도 모습만

그분을 닮지 말고 생각도 닮아야겠습니다.

더렵혀진 세상을 새롭게 만들려 물로 다 쓸어버렸지만

오랜세월 물은 흘러가면서 더러움을 깨끗한 샘물을 만들려하지만

일부 간악한 사람들이 지배 하려하며 힘과 부로 과시하였습니다.

마지막 퍼즐을 기회로 주었는데 지키지 못하고 대자연도 지배하려하다

창조주께서 재앙을 세상에 주었으니 사람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니 자연을 사랑하는 길이 하느님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권력다툼 노예제도 사라진게 아니라 주도권 다툼이 이상한 핑계

더러워진 세상을 새롭게 정화하려 하였는데 다시 더러운 물이 고이기

시작하여 멈추지 않고 지키지 못하게하니 점점 자신의 이익이

인간의 욕망으로 세도되어 제도를 만들어 문명이 발달할수록 욕망은 힘과 자리였습니다.

보이는세상과 감춰진 세상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여서이니

우리의 삶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소중하고 생명을 지켜 주며 보이지 않아도

속이 편할 때이니 속이 우리의 마음뿐아니라 건강도 지켜주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의 하느님 세상의 주인 세상에서는 안 보이는 주님을 믿는 것이

당신의 자녀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철학을 가진 두 종류로

세상을 살지만 당장 보이는 것은 배를 불려주는 돼지의 근성이었으니

철학만 가지고 도덕을 지키려하는 것은 시대의 맞지 않는 일방적인 자기의 모순.

가장 현명한 것은 정의 부르심에 대답하고 시대를 읽어가는 사람들이 세상 이었습니다.

 

약속

옛날이야기로 거룩한 말씀이 회석되어 종교의 자유를

말하지만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거룩한 말씀이 책속에 에언자들의

오늘의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일을 거룩한 성경에서 느끼면서

나도 나를 잘 모르기에 세상일만 보았는데 정말 소중한

것들은 숨어있었기에 성경에서 궁금한것들을 풀어주니

새로 태어난 기분인가 유식해지는 나를 보았습니다.

약속의 땅이 구약이고 신약인인데 성당을 몇십년 다녔어도

약속의 땅은 옛날 유럽의 땅이며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한 글인 줄

알았는데 신약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구약이 길을 터주었습니다.

그뿐아니라 온라인이 대세인 지금 암울한 일을

과학으로만 풀으려 하는데 유통이 없는 무한의 세상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믿거나 말거나 저마다의 희망의 메시지.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루신 창조시대가 구약이라면 그리스도 시대

신약으로 예언자들이 복음 우리의 삶에서 약속이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계시서 역사의 기록

성경이라고 거룩한 말씀이 옛날이야기 같다고 하면서도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의 이야기가 되고 말씀이 나한테

하시는 것같기에 듣게 되었고 거룩한 독서 세상속에세 영원히

멈출때까지 함께 할 것이며 아무리 감동가는 책도 몇 번을

읽다 보면 지루해서 안 보는데 성경은 안보아도

잘 간직하고 싶은 거룩한 책이며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신비였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하여 저술 한 하느님의 말씀

나의 관점과 태도는 과연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기에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동안 시간은 많은데 가까이 주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는 것은 주님을 뵈올날이 가까워지니

정신이 번쩍드는게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가까워지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말씀만 남으며

세상 사람들이 영감받아 하느님 세계를 알리며 우리에게 과정따라

심판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공현 대축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8세기 말 성탄 축일을 따라 공현 축일도 8일 동안 지내면서 8일째 되는 날에 주님의 세례에 관한 말씀을 읽도록 하였다. 13세기 프랑스에서 이날을 주님 세례 축일로 지냈으며, 로마 전례력에는 1960년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말씀의 초대


오늘 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이다. 주님의 종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시고 민족들의 빛이 되실 것이다. 그는 보지 못하는 이의 눈을 뜨게 하시고,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제1독서).
요한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분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실 것이다(복음).

 
 
 제1독서:

<여기에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이 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1-4.6-7<또는 사도 10,34-3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세례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이에 대해서 겸손하시기 때문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물을 축성하기 위해서 등으로 해석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인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 일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물속으로 들어가신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은 일차적으로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죄 속에서 죽어야 할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일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또 세례의 물은 과거를 씻어내고 ‘새로 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새 생명으로 이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세례도 새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새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세례 베풀기를 사양했습니다(마태 3,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태 3,15).


하느님의 뜻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인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선언하십니다(마르 1,11).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신원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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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세례성사의 물의 상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과거의 자신은 죽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첫걸음이 됩니다.
그 길은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어서
죄인들을 위해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코 쉽고 편한 길은 아닙니다.
좁고 험하고 먼 길입니다.
가다보면 누구나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그런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나가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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