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문화/세상 이야기

아돌프 히틀러.정의.논어.

우리들 이야기 2021. 7. 28. 10:33

캐나다  작은 프랑스, 퀘백

캐나다 속 작은 프랑스, 퀘벡캐나다의 퀘벡 주에 가면 다른 주와 구별되는 특이한 모습이 나타난다. 프랑스식 건물이나 거리 풍경이 나타나고 상점의 간판은 프랑스 어로 되어 있다. 캐나다의 다른 주에서는 영어를 주로 쓰지만, 퀘벡 주에서는 주민의 80% 이상이 프랑스 어를 쓰고 있어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퀘벡 주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곳으로, 1793년 영국 연방에 포함된 이후에도 프랑스 인의 후손이 남아서 프랑스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퀘벡 주민은 자신을 ‘캐나다 사람’이 아닌 ‘퀘벡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문화적 정체성이 강하다. 그러나 캐나다 내에서는 마치 모자이크처럼 나름의 색깔을 유지하며 캐나다 전체 문화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정치가 개판이라 정치를 직접하려 정치게에 입문했으나

더럽고 치사해서 정치를 접고 고향에 내려와서 백성을 가르치는데

한 청년이 집안 이 별볼일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과거에 등제를

못하는 것을 보고 개천에서 용났다고 했다지요.

볼품없는 작은 냇가에서 용이 났다고 하였답니다.

 

군왕은 배고 물은 백성이라고 물이 움직이는 대로

배는 항해하며 뒤집기도 하고 잔잔하게도 한다니까 물이 백성이랍니다.

 

 

정의

불의를 이기는 것은 자리가 아니고 정의였습니다.

처음엔 지는 것 같아도 눈비를 맞고 쓸려나가면 사실이 남으면서

정의가 이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의는 잘못된 것은 고치고 잘한일은 지켜나가면서

정의롭게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물질 만능 시대라도 가치가 더 위에 있는 세상이

정의가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Adolf Hitler)

ⓒ Director/wikipedia | CC BY-SA 3.0

당 집회에서 히틀러는 기본주제별로 문제점을 정리하여 청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

1920년 3월 군에서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 운동에 전념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갈고리십자가 모양의 당기를 만들었다.

갈고리십자가의 적색은 사회주의적 이상을,백색은 민족주의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리아인의 승리를 의미했다.

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

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히틀러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렉슬러파가 합법주의와 사회주의를 제창한 데 반해

히틀러파는 폭력주의와 군부·관료에의 접근을 주장했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ü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되었다. 

(퓌러). 또한 당기관지〈민족의 관찰자 Volkischer Beobachter〉

를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그의 주변에는 나중의 유명한 나치

지도자가 된 A. 로젠베르크, R. 헤스, H.  괴링, J. 

슈트라이허 등이 집결했다.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나치는

바이에른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바이에른 동맹을 폭력으로

습격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이에 바이에른 정부는 나치당을 탄압했고 히틀러는

1922년 6월 24일부터 7월 27일까지 수감되었다.

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1923년 9월 26일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쳤다.

바이에른에 있는 극우운동의 공동단체인 '독일투쟁동맹'을 이끌고 있던

히틀러는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의한 베를린으로의 진격,

전독일 우익독재정부의 수립을 제창했으나,

그는 나치당만의 단독정권을 세우거나 바이에른 우익정부에

반역하여 봉기를 일으킬 의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당이 바이에른 정부에 이용당하고 있으며,

나치당을 전독일 우익독재정권의 수뇌부에서 배제할

의도임을 깨닫자, 1923년 11월 8일 히틀러의 투쟁동맹은 뮌헨에 있는

한 맥주 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비어 홀 폭동). 이 봉기의 목적은

바이에른 정부 수뇌를 포섭하여 지연되고 있던 전독일 우익독재정권

수립에 나치당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바이에른 정부는 처음에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약속했으나

군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봉기를 진압하는 쪽으로 돌아서 이 비어 홀

폭동은 실패로 끝났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히틀러는 같은 해

11월 11일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히틀러는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고 봉기의 의도를 뚜렷이 표명하는 등

결연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가 높아졌고,

봉기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또한 그는 이 봉기로부터 운동의 목적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9개월 동안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생활은 자유로워서 방문객들과 담화도 하고, 동지들과

식사도 했으며, 마음대로 독서할 수도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半)자서전 겸 나치 사상의 해설서인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모리츠와 헤스가 히틀러의 구술을 필기했고, 이것을 매주 토요일

저녁 감옥 내의 나치 동료들이 개최하는 공동집회에서 발표했다.

히틀러가 감옥에서 석방될 무렵〈나의 투쟁〉의 상권은 거의

완성되어 1925년에 출판되었고, 하권은

막스 아만의 도움을 받아 1927년에 발표되었다.

1930년에는 합본판이 나왔고 1943년까지 총 984만 부가 판매되었다.

히틀러의 사상은 대부분 이전의 저작이나 그가 빈에서

생활할 때 배운 우파의 급진주의에서 채용한 것들로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종이나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은 불변적인

자연의 질서이며 아리아인은 인류에서 유일한 창조적 인종이다.

인류의 자연적 단위는 민족이며, 독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다. 또한 국가는 민족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러한 국가의 사명을 저버렸다.

모든 도덕성과 진리의 판단기준은 민족의 보호와 그 이익에 있다.

이러한 기준에 근거할 때 민주주의적 정부는 첫째,

있지도 않은 민족간의 평등을 상정하기 때문에, 둘째, 민족의

이익을 투표나 토론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민족의 통일성은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에게서 그 화신을 찾을 수 있다.

지도자 아래에서 당(히틀러는 민주적 정당들과 나치당을

구분하기 위해 '운동'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음)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요소를 찾아내야 하며,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즉 히틀러는〈나의 투쟁〉에서 독일민족 지상주의,

사회적 다원주의와 민족생존권의 확보,민족공동체 사상,

의회정치와 계급투쟁에 대한 반대 등을 피력했다.

히틀러에 의하면 나치즘의 주된 적은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여기에는 민주사회주의도 포함됨)였다.

또한 그에게  유대인은 모든 악의 구현체였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치당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나치당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192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속출했다.

독일의 경제는 통화개혁과 도스 안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평판도 좋아졌다.

1925년 3월 9일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히틀러에 대한

연설금지 조치는 프로이센·작센·바덴 등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나치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1926년 2월

당간부회의에서 히틀러는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926년 1월 히틀러는 친위대(Schutzstaffel)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돌격대의 재건을 완료했다.

이무렵 도시와 농촌에서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한 나치당은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으면

민주공화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한편 그는 이복누이의 딸인

겔리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1931년 9월 18일 그녀가

자살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했다. 겔리는 히틀러가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1929년 7월에 시작되는 배상에 관한 영 안(Young Plan)에

반대하여 히틀러는 국가주의자인 알브레히트 후겐베르크와 협력했다.

후겐베르크의 국가당 조직과 그 기관지의 도움을 받은

히틀러는 최초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천부적인 선동가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치자금을

통제하고 있는 중공업계의 대자본가들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우파노동조직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이들에게서 나온 정치자금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고,

중하층과 실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중산계층(특히 대정당이나 압력단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계층)·

청년·부인들이 무리를 지어 나치당에 입당했는데 이것은

관료와 군부, 그리고 자본가에게

접근하려던 히틀러의 방침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 5월 사회주의적 요구를 정면에 내세우며

히틀러에 대항하던 슈트라서는 당에서 추방되었다.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격과 대중선동으로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600만 표

이상을 득표하면서 독일의 제2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선거직전 라이프치히 최고법정에서는 군대에서

나치 세포를 조직하려다가 체포된 장교들의 군사재판이 있었다.

9월 13일 법정에 출두한 히틀러는 "나치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이므로 폭력이 필요없다.

나치는 군부를 붕괴시킨다든가,

군부를 대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잡는다면

합법적 수단을 통하여 당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개조할 것이며,11월혁명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증언하여 군 간부와 독일

지배세력의 호의를 얻었다.

곧이어 독일 금융자본가의 중심 인물 

샤흐트도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유대인(Jew)

19세기 후반,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 Grendelkhan / wikipedia | Public Domain

히틀러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Adolf Hitler)

Director/wikipedia | CC BY-SA 3.0

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1932127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히틀러와 대자본가들의 회담은 나치와 독일

지배세력의 결합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히틀러는 19323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했고

히틀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파펜의 연립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같은 해 7월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절대적인 독재권을 확립시켜나갔다. 먼저 나치 돌격대 대장으로서 군의

불신임을 받고 있던 에른스트  을 체포하여 1934년 6월 29일 재판 없이 처형했다.

또한 슈트라서·슐라이허 등도 함께 숙청했다.

나치 돌격대의 붕괴에 만족한 군부도 히틀러를 지지했다. 이때부터 독일  

3제국은 지배세력과 혼연일체가 되어 군비의 급격한 대확장과 군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독일의 국력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이 되었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지배 아래 독일은 준전시경제체제를 수립하여 대자본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자급자족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그리고 중하계급 출신 청년들의 지배기구로의 충원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올라갔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눈부신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했다. 같은 해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6월에는  영국-독일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반히틀러 운동은 지지자를 잃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그는 '불세출의 영웅','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의 배후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영국·프랑스 등의지지 또는 묵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1937년 11월 5일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의지를 표명했다.

1938년 2월 4일 이들 가운데 전쟁개시를 주저하는 자를 파면한 히틀러는 자신이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39년 9월

그는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부의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40년 5월 대프랑스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보수파와 군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소련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특히 1942년말 독일 제6군단이 스탈린그라드

(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포위당했을 때 독일군의 후퇴를 금지

시킴으로써 2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게 했다.

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전쟁범죄).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7월암살음모사건). 즉 독일에서 히틀러 반대세력은 나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극히 적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동지로서 존경했으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내부의 친독일파였으므로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은 스페인 내란

이후 상호협력했으나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실망한 히틀러는

중요한 정책을 무솔리니와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이해는 존중했지만 이탈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독일의 패배 또한 대부분 무솔리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든 타협을 배척하고 최후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음독자살했다

(권총자살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소련 자료에 의해 음독자살로 판명되었음).

그의 시체는 소련군에게 발견되었으나 독일측에 반환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성격

Bain News Service/wikipedia | Public Domain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조카인 겔리가 자살한 후에는 에바  브라운을 사랑하여 그녀를

개인비서로 채용했다. 스포츠와 유행과 가정밖에는 관심이 없는

평범한 부인이었던 그녀는 히틀러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다음날 이들 부부는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의 일상생활은 어딘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술에 애착을 느낀 그는 특히 제3제국의 기념비로 남을 만한

공공건축물의 건립을 소원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부근에 있던 산장에 가서

자신의 사진사·의사·운전수·비서에 둘러싸여 마음 편히

담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때의 화제는 대개 개 사육법, 최신유행, 예술계의 이야기,

개인생활의 사소한 사건 등 다양했는데, 오페라의 노래를 듣고

여가수의 이름을 알아맞추기 게임을 즐겨 했다.

이 산장에서 각종 정치적 구상을 다듬는 경우도 있었다.

히틀러는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 경쟁을 유발시켰다.

그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독일제국주의의 극단적인

반영이었고,그 자신은 세간의 평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이상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동방대제국의 건설,

게르만족의 동방에로의 대규모 진출, 열등한

민족의 절멸(絶滅) 및 추방 등 시류에 역행하는

세계관을 고집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마침내 자신도 파멸하고 말았다.

 

자유 의지

자유를 좋아하며 생명을 사랑하는 주님께 왜 히틀러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죽게하였느냐고 따지니까

내가 히틀러를 만들었지 히틀러 마음까지

만든게 아니라고 하였고 핑계같지만 자유는 누구에게나

쓸수 있지만 테두리가 있으니 자유란 책임이기에 우선으로

생명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생각은 두갈래로 갈라져 나의 생각은 천사고

반대편 생각은 악이라고 하니 싸우지만 히틀러 같은

사람은 없었으면 하는데 현실이 만드는 것 같아서 슬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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