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하느님 사랑/주님의 말씀.나의 생각.

신비<김웅렬 신부님>

우리들 이야기 2020. 7. 18. 14:29

 

신비

세상이 변하면서 온라인 세계로

4차산업에 와있어도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가 있더라.

황홀해 어디다 비교할 수 없으면

환상적인 작품이라 부르지 창조적일 때 초현실이라 하듯

초는 첫 마음도 되어가는데 첫 마음이 무너지면

대들보도 쌓아온 담도 무너지더라.

사는 것은 예술이고 보이지 않는 불확실 속에

우리가 놓여 미래가 안 보여도

희미한 길을 가다 보면 경험을 얻으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아무도 안간길이라도 가야겠지

거기서 희망을 보니까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예술세계를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의 세계는 과거일 뿐

힘겨운 현실을 너와 나 함께 살아가기에 누군가
코로나 백신을 완성한다면 불안에 떨지 않을 텐데

돈이면 다 해결되는 세상이라도

마음이 먼저인 것은 자유를 부르니까

그 자유는 책임도 함께 하기에 자유가 아름다운데.

선을 넘어 울타리 밖에서 아니면 말고

식으로 표현의 자유라 하니 기가 막히고

내 생각에 맞추려니 전쟁은 끝이 없을 거다.

사람들은 과학으로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만 풀 수 없는 것을 신비라 하더라

태초부터 하늘과 땅을 이으는 신비가 세상을 지었쓰니.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광야의 유혹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한 단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한 단어는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성서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혹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인간이 살기에 어려운 장소입니다.

일교차가 심하고 물도 귀하고 극한 지방에 사는 짐승밖에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따릅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해매일 때 우상숭배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기 어려운 광야지만 놀랍게도 유명한

수도원들은 광야에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이 살던

장소도 광야였습니다.

즉, 광야는 인간의 몸이 살기는 어려운 곳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는 다른 어느 장소보다도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장소라는 겁니다.

이런 광야에서 예수님은 유혹을 받으십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자기의 하수인으로 만들려고 유혹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악마가 성서를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을 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유혹을 하고,

두 번째는 남을 제 뜻에 따라 움직이려고 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을 하고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자존심에 대한 유혹을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 유혹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유혹보다도

더 강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당한 세 가지 유혹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유혹입니다.

첫 번째,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게 하시오.’

악마는 교묘하게도 이 말을 할 시기가 언제냐?

광야에서 40일간 굶는 중간이 아니라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이제 40일간 단식했어.’ 하고 안심을 할 그 순간에 공격을 합니다.

‘오늘 고백성사 봤어. 시원해.’ 하며 고백소를 나오는

그 순간에 공격을 합니다.

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에 악마는 공격을 합니다.

오랫동안 단식한 예수님은 돌이라도 삼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말이 40일이지, 40일 동안 굶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밥의 유혹을 받으신 겁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큰 것은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돌로

식빵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고 나무로도 햄버거를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꿈도 꾸지 못할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유혹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통령되는 유혹 받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사제들 가운데도 교황이 되는 유혹받으신 분은 손 들라고 하면

아무도 없습니다.

주교가 되고 싶은 사제는 있을지 모릅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절제한다고

하는 것은 큰 유혹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손만 뻗으면 달콤한 것이 생기는 것으로

마귀는 유혹을 하지, 아예 내 세상과 다른 것을 가지고

마귀는 절대 유혹하지 않습니다.

‘너 눈 한 번만 질금 감아라.

그러면 달콤한 것 생겨. 너 충분히 그것 할 수 있어.’

‘돈 봉투 받아. 얼마든지 받고도 안 받은 척 할 수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첫 번째 유혹이 정말 힘들어

하셨을 것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능력남용에 대한 유혹으로, 

우리가 능력 남용할 때 받는 유혹입니다.

또, 밥의 유혹은 항상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연결이 됩니다.

인간은 끝없는 재물의 욕심을 갖고 있기에 끊임없이

밥의 유혹 속에 산다는 겁니다.

두 번째 유혹은 ‘나에게 절을 하면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다시 말하면 남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 역시 밥에 대한 욕망처럼 원초적인 겁니다.

비단 권력을 쥔 소수의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어느 철학자가 ‘생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온갖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이 욕망을 갖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권력을 휘두를 때가 있습니다.

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더 큰

권력을 향하여 몸부림치면서 나가려고 합니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에게는 냉혹하고 그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고,

힘센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려는 유혹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이던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대로 천사들이 당신의 두 다리가 돌멩이에

부딪치지 않게 밑에서 받아줄 것이오.’

당신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자신의 능력을

보이라는 유혹.자존심과 자만심의 유혹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한 번 과시해 보라는 겁니다.

이 유혹이 세 번째이긴 하지만,우리는 자존심 상했을 때가

배고픔보다 더 아픕니다.

그래서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비열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너의 자존심을 저 인간이 상하게 했으니

너도 복수해야 된다고 유혹받습니다.

지금까지 간단히 세 가지 유혹에 대한 해석을 해 드렸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 삽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유혹의 연속입니다.

밥과 재물의 유혹, 권력의 유혹,

자존심의 유혹 등의 노예로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여러 가지 유혹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자주 이기기보다는 유혹에 질 때가

훨씬 많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됩니다.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나침반인 예수님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유혹의 광야는 하느님과 만남의 광야로

바꿔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이 유혹을 이기는 도구를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는 성경을 가지고 덤볐습니다.

예수님은 소리를 질러 악마를 쫒은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내쫓았습니다.

악마의 말은 위선의 말이었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말씀 그 자체였기에, 악마는 아무 말 못하고

세 번의 유혹 후 물러났던 겁니다.

유혹과 시련의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시련과 유혹의 장소로 현재 변질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밖에서는 평화로운데,집에만 가면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그리고 하느님과의 끈이 자꾸 끊어지려하는 그런 시련의

장소라면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말씀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이 시련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 만남의

장소로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은 마귀가 유혹 후 통하지 않자,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

그 못된 놈이 예수님에게 지고 난 다음에 포기해야 되는데,

‘오늘은 물러나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해서 너를 유혹할거야.’

그 유혹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려가며 기도하면서

예수님에게 옵니다.

고통을 인간적으로 당하기 싫으셨겠죠.

그래서 마귀가 어떻게 유혹합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게 합니까?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즉시 예수님은 신성의 기도로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소서.’

여기서 마귀는 또 패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시 극심한 고통 중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아이고 꼬라지 좋다.

네 아버지 어딨어? 너 말짱 속은 거야. 너 버림받았어.’

예수님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해서 저를 버리셨습니까?

그때는 예수님의 인성을 치고 오는 그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그러나 제 영혼을 봉헌합니다.’

이 악마라고 하는 놈은 예수님한테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덤빕니다.

하물며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 늘 몸뚱이에 지고,

환경에 지고, 제 성질에 지고, 자기 악습에 걸려 넘어지는

약해 빠진 우리들을 마귀들이 포기할 것 같습니까?

한 번에 총 고해를 봤다고 죽을 때까지 성인으로 살 자신이 있냐는 겁니다.

피정 갔다 와 눈물콧물 짜고 회개했다고 마귀가 그 인간한테

손을 놓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관 두껑 닫힐 때까지우리들의 유혹에 대한 싸움은 지속되어야 됩니다.

사제도 제의를 입고 마지막 관 두껑의 못이 박히는 소리를 들을 때야 ‘

드디어 사제로서의 생을 마감하는구나.’

그 전까지는 아무도 수도 없이 많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

여러분들 집의 십자가 밑에 표어를 하나 만들어 붙이십시오.

‘조심, 조심, 마귀 조심.’ 왔다 갔다 하는 가족들이 볼 거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마귀가 우리들을 유혹할 때 하는 세 마디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얘, 그 죄 짓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살아.’ .‘왜 너만 유별나냐?

남들도 그 정도는 다 죄 짓고 살아.’ 이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너 아직도 젊어. 죽을 날 멀었어.’‘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폼 나게 살아봐.’ ‘실컷 죄 짓고 숨 끊어지기 전에

신부님 불러서 성사 한 번 보면 깨끗이 사해지잖아.’

자꾸 하느님 앞에 나가고 회개하는 것 자꾸만 미루게 합니다.

‘그렇지 아직 나 젊어. 이 좋은 세상 좀 즐기고

실컷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 세 번째 말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죄 짓지 말고 요번이 마지막이야.’

오늘 루카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는

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귀는

덤벼들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 매달리지 않고는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유혹은 원초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혹을 당하실 때 마다 말씀과 기도로 물리쳤듯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 사순절을 거룩하게 살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사순 제1주일(3/10)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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