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문화/세상 이야기

히틀러

우리들 이야기 2023. 1. 15. 06:38

 

불안은 정신의 엔진

불안이 자기를 지켜주는 약이었다.

불안은 삶의 관심이라 사서하기도

하지만 가야할 현실에서 사고를

미리 준비 하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2023   1

 

지식과 지혜

옳고 그름 책상에서는 펜만 가지고

하지만 지혜는 경험이며 삶의 현장.

지식이 운전만 한다면 지혜는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지식도 지혜도

겸비해야 삶을 편안하게 살수 있었다. 2023   1

 

연결

꽃도 연결되어 더 아름답듯이 물고기도

서로가 도울 줄 아는데 짐승은 이익대로

잡아 먹듯이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꽃향기지만 짐승만이 마녀의 심보라 세상은

마녀와 꽃이 전쟁을 하는데 연결의

향기가 고우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지.2023    1

 

 

1. 밀고

내가 웃어야 세상이 웃는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을 바짝차리면 살아남으니

미리 겁먹으면 해결될 일도 포기한다.

마귀사냥꾼  밀고자들은 마을에 이상한 질병에

걸리거나 기이하게 죽은 사람들

다 생각대로 밀고하는 그들은 마귀였다.

 

 

 

덩케르크-히틀러-스탈린그라드

페이스북()로 기사보내기 트위터()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로 기사보내기 URL복사()로 기사보내기 이메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저장

바로가기 메일보내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와 관련하여 그간 거의 못들었던 유럽의 어떤 도시 이름이 연이어 우리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그 도시는 프랑스에 있는데 도시명의 어감이 그 나라의 다른 이국적인 도시명들과는 다르게 좀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집니다. 이 글 타이틀에 가장 먼저 보이는 덩케르크, 전쟁과 상관있는 도시라서 그런 걸까요? 2017년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로 우리나라에 상륙했던 ‘덩케르크’는 최근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정복으로 또 한 번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번엔 제목이 '디지털 덩케르크'로 바뀌었습니다.

디지털 덩케르크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온라인 상의 SNS를 통하여 아프가니스탄의 무고한 국민들을 탈레반의 폭압에서 구해내고자 벌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 범 세계적인 캠페인입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그들의 탈출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지요. 부디 80여 년 전 유럽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처럼 크나큰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이렇듯 덩케르크라는 도시는 이제 철수와 구출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매번 연출하는 작품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동명 영화의 지대한 영향일 것입니다. 그의 영화 덩케르크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한참 뒤 세대에까지 덩케르크에서의 철수와 구출 작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덩케르크 이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엔 됭케르크로 더 많이 등장하니 말입니다. 그땐 틀리고 지금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맞고 그때가 틀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언론 지상엔 이 두 도시명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다분히 생경한 도시라 외래어 표기가 아직 정립이 안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검색해보니 영어 표기로는 덩케르크(Dunkirk)가 되고 불어 표기로는 됭케르크(Dunkerque)가 되나 봅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에 먼저 상륙한 덩케르크로 쓰고 있습니다.

덩케르크 철수는 1940년 5월 프랑스 최북단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 갇힌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작전으로 인해 30만 명 이상의 영국군이 독일군의 위협에서 도버해협(영불해협)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공 요인은 처칠의 리더십이 끌어낸 영국 국민과 군인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국민입니다. 군인이 군인을 구출하는 것은 당연스러운 일이지만 민간인이 군인을 구출하는 것은 당연스럽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덩케르크 해안선에 갇힌 연합군 (1940)

덩케르크에 묶인 군인들을 구출하려면 배가 필요했는데 데려와야 할 군인이 30만이 넘어 당시 영국 해군이 보유한 배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때 배를 소유한 민간 선주들과 어부들이 나서서 자국의 군인들을 구출하러 출항한 것입니다. 평시 구출 작전이 아닌 전시에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물자만의 징발이 아니라 그 물자인 배를 민간인이 몰고 가야 하는 것이라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화에서 본 그대로의 장면이 194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약 900척의 배가 9일간 그 바다를 오가며 철수 작전을 벌였는데 그중 전함은 220척이라 하니 훨씬 더 많은 배들이 전투 기능이 없는 민간인이 끄는 배였습니다. 물론 군함보다는 작은 소형 배들이었겠지요. 이쯤이면 이 일이 놀랍고 이례적인 정도가 아니라 존경스럽고 부럽기까지 합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보인 영국인의 애국심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모는 배 앞에는 유니언 잭이 펄럭이고 있었겠지요.

성공 요인은 아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군의 오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독일 군사권을 쥔 총통 히틀러 개인의 오판입니다. 이런 행운까지 겹쳤기에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 것입니다. 당시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 중이었는데 연합군은 그 전선의 방어에 급급해서 아래 프랑스를 비워둔 상태였습니다. 그 시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실제 독일의 주공은 프랑스 북동부 험한 삼림 지역인 아르덴 고원을 돌파해 믿을 수 없는 초고속 속도로 프랑스를 동에서 서로 빗자루 쓸듯 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프랑스 군 지휘부는 그 침공 보고를 믿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준비가 안된 프랑스와 동맹의 영국군은 이제 독일군에게 동남북으로 갇힌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갈 곳은 서쪽의 바다만 남아 덩케르크 해안에 갇힌 것입니다. 대서양의 다른 항구인 칼레와 불로뉴도 이미 함락된 상태였으니까요. 그런데 불과 20km도 안 남긴 그 시점 독일의 공격이 그림 같이 딱 멈췄습니다. 히틀러가 공격을 중지시킨 것입니다.

이 부분이 불가사의합니다. 단박에 독일이 유럽의 서쪽 끝까지 깨끗하게 정복하여 대서양 해안선이 다 그들의 영토가 될 판인데 고지 바로 코앞에서 붉은 신호등 앞 차량처럼 전차들이 멈춘 것입니다. 전선의 지휘관들도 이해불가이나 총통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 군의 속도 조절을 위해서, 또는 심복 괴링이 그가 지휘권을 가진 공군이 전공을 가로채기 위해 히틀러를 설득했다고도 합니다만 그래도 그것만으론 설명이 완벽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나치 독일의 1인자 히틀러 총통과 2인자 괴링 원수

저는 다음 추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는 내심 영국과는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협상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는 그의 혈통인 아리안을 최고 민족으로 생각하며 최강 제국을 꿈꾸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을 동경하여 베를린을 과거 로마와 같은 세계 제국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게르마니아를 설계하던 그였습니다. 그의 눈엔 빅토리아 여왕 시절부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대영제국도 그런 롤 모델로 보였을 것이고, 그만큼 영국이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국가와 전쟁을 하는 것이 껄끄러운 것이지요. 그래서 그 정도 몰아붙이면 협상 카드를 영국이 들고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그 영국이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전임 챔벌린 수상이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처칠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을 외치던 그가 선택한 것은 독일과의 결사항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시작됩니다. 결국 뒤늦게 괴링의 뜻대로 독일 공군이 출격하지만 결과는 덩케르크의 무사 철수로 막을 내립니다. 영국 공군도 신형 전투기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싸웠으니까요.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벗어나 전열을 정비한 영국과 연합군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944년 그 해협을 건너 다시 프랑스 땅을 밟게 됩니다. 이번엔 덩케르크가 아니고 그 아래 노르망디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때 독일이 침략한 길의 반대로 대서양 해안부터 서에서 동으로 히틀러가 있는 베를린을 향해 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여기엔 전에는 없던 떠오르는 최강국 미국과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의 적으로 새롭게 등장을 했습니다. 그래도 독일의 항복까지는 아직도 1년이 남았습니다. 4년 전 독일은 아르덴 고원을 전차로 돌파해 5주 만에 파리를 함락했는데 말입니다.

히틀러는 그의 전쟁에서 덩케르크의 오판처럼 또 한 번 치명적인 오판을 하게 되는데 이번엔 덩케르크 반대 편인 동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에서였습니다. 과거 제정 러시아 차르 시절 차리친이라 불린 이곳에서 1942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독일과 소련은 매우 익스트림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필이면 그 도시 이름이 스탈린그라드여서 그랬습니다. 슬라브족을 열등한 민족이라 깔보고 공산주의자를 혐오한 히틀러였기에 소련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의 이름을 가진 이 도시를 그는 반드시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본래 침공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쟁 연료 확보를 위해 유전 지대인 소련 남부 바쿠를 점령하러 가다가 만난 도시였습니다. 물론 볼가강 연안의 유서 깊은 도시라 그 강을 타고 북상하면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까지 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는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사항전 후 항복한 독일의 파울루스 사령관 (1943)

이 스탈린그라드에서 30만 병력의 독일군은 20만을 잃고 나서야 지휘관이 항복을 합니다. 도시의 90프로를 파괴했음에도 말입니다. 베를린에서 너무 멀어 물자 보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악명 높은 소련의 겨울을 만나서 그랬습니다. 독일군은 그 옛날 천하의 나폴레옹도 혀를 내두르고 만세를 부른 그 동토에서 겨울이 오기 전 전투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러일전쟁 시 러시아가 일본군을 바다가 아닌 육지로 끌어들여 전투를 벌였다면, 그리고 그 혹독한 겨울을 그들에게 맛보게 했다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역사상 러시아 정복에 성공한 군대는 칭기즈칸이 유일합니다. 속도전의 귀신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독일의 예상과 달리 전투가 길어진 데에는 덩케르크 때처럼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의 애국심도 한몫했습니다. 시민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전투에 동원되어 도시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독일에는 없던 소련 여군의 전투 참전도 승리에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여자는 끔찍이 아꼈던 나치들에게 소련 여군은 신기한 존재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전투가 늘어질수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해갑니다. 히틀러는 절대 항복하지 말라 명령하였고, 스탈린은 절대 도시를 포기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결국 연합국인 소련의 스탈린이 승리하였습니다. 그토록 경멸하던 슬라브인에게 세계제국을 꿈꾸던 독일의 히틀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지금 볼고그라드로 이름이 또 바뀌었는데 그때 진작 바뀌어 있었다면 어쩌면 히틀러는 그 도시를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폐허가 된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탈환 (1942)

결론적으로 덩케르크는 히틀러가 계속 속전속결로 밀어붙여야 할 전투였다면 스탈린그라드는 하지 말고 그냥 지나쳤어야 할 전투였습니다. 두 도시가 속한 영국과 소련 국가에 대한 히틀러의 우대와 홀대가 두 전투의 결과를 완전히 가른 것입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시 덩케르크와 스탈린그라드는 히틀러가 침공한 영토의 서쪽과 동쪽의 끝이었습니다. 그의 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거기서 밖으로 더 팽창하지 못하고 이젠 서동 양쪽에서 연합국의 협공으로 안으로 밀릴 일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지도자나 리더의 판단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아, 이것은 어디까지나 히틀러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합국이 이겼으니 제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가정입니다. 누가 뭐래도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인류의 재앙이고 절대 태어나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물론 히틀러가 이 두 전투를 잘 처리했다 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패전국 독일과 그의 생존 기간이 조금 더 연장될 수는 있었겠지요. 그래도 그의 이런 오판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 불행했던 전쟁 기간을 조금은 단축시켜줬을 테니까요.  

2차 세계대전 핫 플레이스인 도버해협 주변 지도 

1995년 봄 어느 날 밤 저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벌어진 그 바다보다 살짝 위쪽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YS 문민정부 시절 여행 자유화에 이은 세계화 정책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배낭 하나 짊어지고 전 세계로 몰려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탄 배는 영국의 동남부 도버 위 람스게이트 선착장을 저녁에 떠나 아침에 벨기에의 오스텐데 항구에 도착하는 야간 여객선이었습니다. 출발 도착 두 도시 모두 과거 철수 작전이 벌어진 도버와 덩케르크보다 북쪽에 위치해있습니다. 프랑스의 덩케르크와 벨기에의 오스텐데는 똑같이 대서양을 바라보며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지근거리의 도시입니다.

당시 런던의 빅토리아역에서 람스게이트행 버스를 놓쳤는데 멀리 거기까지 가겠다는 택시가 없었습니다. 이에 동행했던 회사 동료들과 근처에 있던, 왠지 영업도 할 것처럼 보이는 자가용을 흥정해서 타고 선착장에 도착해 겨우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나라시 택시.. 대단한 대한의 건아들이었습니다. 덩케르크 관련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바다와 추억이 생각나서 잠깐 떠올려 봅니다.  

 

'문화 >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엉망징창.슬프다. 그림  (1) 2023.02.24
양심  (0) 2023.01.20
우주에게 길을 묻다  (0) 2022.09.12
나라의 주인  (0) 2022.09.03
이제벨  (0)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