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문화/대한의 역사.세계사 이야기

독립가 도산 안창호.남강 이승훈

우리들 이야기 2023. 2. 14. 10:59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의돈수'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흥사단이라는 수양단체를 만들어 이끌었습니다.
흥사단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필요한 자금의
80~90%를 지원했습니다.

특히 안창호 선생은 1913년 창단된 흥사단에
'정을 서로 주고받는 것도 갈고닦아야 한다'는 의미의
'정의돈수(情誼頓修)'를 단원 교육에 활용했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의미의
'애기애타(愛己愛他)'를 리더십의
기본으로 생각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인성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도
고정 불변한 것도 아니기에 사랑하는 공부를 통해서
날마다 사랑하기를 힘쓰면 사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성품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창호 선생께서 무엇보다 인격과 성품을
중요시했던 이유에는 바로 독립 후에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존경받는 국가, 존경받는 국민이 되고자 했던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거기에 맞는
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중 먼저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나와 타인을, 더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가장 귀하면서도
가장 깊은 학문인 사랑,
그 깊이를 깨닫는 사람은
세상의 지식을 모두 아는 것과 같습니다.


# 오늘의 명언
아무리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참된 사랑의 정신이 없다면
그 지식은 세상을 해칠 뿐 절대로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 도산 안창호 –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60이나 되셨을 겁니다.

[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 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네댓 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그래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라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크리스토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조만식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두 번째 투옥된 것이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으며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핬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크리스토의 모습을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이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라고 속으로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크리스토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으며 이승훈 선생은 1915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다.
3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다.
하느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으며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며.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으며  오산교회를 방문하는 저명한 성직자 님들이

그 단정함과 질서정연 함에 감탄을 하곤 했다고 한다.
이승훈 장로는 1919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사랑과 나라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
셋째로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만나 동지로 포섭하였고,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크리스토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결국 크리스토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었고.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으니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러게 기록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갔으며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느님의 작품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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