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나의 글/나의 이야기

괜찮아!

우리들 이야기 2021. 4. 24. 17:23

 

괜찮아!

젊은이들 말은 괜찮아! 하지만 나이 든

늙은이 위로의 말은 느리게 괜 찮어 지요.

부자와 가난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타고난 운명도 아닌데

그런데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공주로 크고 싶었던가요?

상처가 많았고 자존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구장을 하는 잘생기고 똑똑한 할아버지

논이 많은 아버지의 잘사는 시골의 그 애는 동네에서

공주라고 부러운 대상이었습니다.

이십 년 만에 생긴 그 아이 손이 귀한 그 집에서는

일찍 학교를 보내고 높은 학교 보낸다는 기대를

가지게 한 아이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일곱 살에 아버지 바람이 나서 할아버지한테 쫓겨나고

공주라고 생각하는 어린 그 아이는 상처가 많은

동심의 소녀가 되었는데 자존심은 많아서 아버지가 없어

가난해도 부자인 줄 알고 자기가 공주인척했으며 집안에

어른인 할아버지의 유일한 사랑을 받아 겸상하였으며

다른 식구들은 깜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데 어린 것이

거만해서 가난한 애하고는 놀지 않고 부자

애들하고만 놀려 하였으니 마음 까지 가난하였습니다.

오빠도 없었고 아버지도 없고 여름이면 나무 계다

겨울이면 썰매도 팽이도 오빠나 아버지가 만들어 주는데

폼 만 잘 잡고 그런 거 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 데리고 앉아서 엄마 흉을 보았는데

어린 마음이라도 엄마 욕하는 할머니가 왜 그리 미웠던지요.

엄마랑 어른들은 싸우다가도 금방 풀어지기도 하였지요.

엄마가 아버지도 없는데 동생이 병이 나면 업고 이십 리나

되는 병원을 찾았지만 심장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갈 사람 손들라고 하였는데

안 들으니 반 애들이 깜짝 놀라서 처다 보았지요.

사실은 상황보다는 공부나 학교 가기 싫었는데 학교

안 가도 되니 괜찮다고 나 혼자 스스로 판단하고

속으로는 학교 안 갈 생각하니 좋았으며

사실 아침이면 학교 안 가는 어른들이 부러웠습니다.

또 어린 것이 죽은 동생이 슬퍼서 더 그랬나 봅니다.

말 배우느라고 자잘 자잘 하였고 이쁜 동생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동생 이름을 부르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하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자는 줄 알았는데

어른들이 저세상으로 보낼 때 하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엔 학교 안 가서 좋았는데 나중에는 교복 입은

애들이 부러웠고 버스가 하루에 몇 번씩 다니는데

나는 그대로 시골에 살 수 없어 시내에 사는 고모 집에서

학원 다니어 양정점을 내려 하였습니다.

사촌들은 다 학교 다니기에 중고등학교 공부라는 것도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어도 어깨 너머 조금은 배웠답니다.

고모부가 그래도 배워야지 하였는데 고모가 괜찮다고

하길래 더 예뻤고 고모네 작은방에서 고모 딸하고 함께 쓰는데

아침에 일어나려 하는데 다리가 힘없어 자꾸 넘어지니

고모부가 연탄가스 마신 거 같다고 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물김치 마시고 가까운 곳에 병원은 있지만 조금 견디어 보니

괜찮아졌고 학원 선생이 문병 왔던 것 같았습니다.

고모 집 옆에 극장이 있었는데 저녁때 나가니 괜찮으냐고

극장 직원이 물어봐서 어떻게 알았지 하다가 고모가 이야기했구나.

그래서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하나보다 생각하였고

별일 없이 보낸 날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연탄가스에서

많은 걸 배웠고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다가 아니었습니다.

버스가 자주 없고 세 시간에 한 번씩 오면 줄 서서 타지 않고

억척인 사람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서로가 의자 앉으려

머리를 써서 짐꾸러미를 던지어 자리를 맡았으니 참 후진국 인생

어린 것이 5일에 한 번씩 서는 장날이면 할머니 따라

공부보다는 이것저것 눈이 풍년이니 기웃거리었고

아는 식당에 가서 국수도 먹어보고 아저씨들이 막 걸리집 이었습니다.

보는 대로 신기한 것이 장날이면 왜 그리 있었던지

어려서부터 궁금한 것이 많았으며 엉뚱한 생각 상상력은 풍부했는데

그때는 한심한 애였지만 공부를 했다거나 유학이라도 가서

나의 이런 마음을 살렸다면 유명한 여류의 작가라도 되지 않았을까요?

아직 말도 안 되게 상상하는 마음은 여전한 거 보니

추억만 안 늙는 것이 아니고 마음도 늙지 않나 봅니다.

가장이었던 아버지 한 사람이 집을 나가니 집안은 파탄 나서

모두가 힘들었으니 공주인 줄 알았던 그 아이는 한 많은 동심을

보내었고 여전히 철이 없어도 상상의

꿈은 컸기에 이루어지지 않고 늘 목마른 아이였습니다.

열아홉 순정인가? 그 나이에 서울 바람이 불어 누군가 오라 해서

나의 처녀 시절은 서울에서 보내었고 비록 공장에는 다니지만

산골에 처녀보다는 세련미가 있었답니다.

아무나 입지 못했던 검정 코트에 토끼털 카라 남동생이 나가면

멋쟁이 서울 처녀 서로가 자기가 매형이라고 한다면서 우쭐대던

남동생 운명 달리하고 안 보이면 잊는다고 옛날 동생이 되었습니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인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남편을 만났으니

지금 남편인 남자친구가 면회 와서 만나 남산에 가서

사진도 찍었으며 우리들의 사랑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작되었고 나는 서울에서 남편은 원주에서 군대

생활하며 전화가 없을 때라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나누면서 우리들의 사랑은 더 깊어갔답니다.

남자친구 이름이 여자 같아서 자주 오는 편지에 나의 친구가

여자인 줄 알고 질투했었는데 남자친구인 줄 알고 그 친구도

이뻐해 주었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고 남동생이 죽으면서 나의 객지 생활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남자친구하고 약혼식을 하고

그때부터 양부모가 다 아니 동네에서는 연애하던 커플이 처음으로

성공해서 이루어 지었습니다.

나이가 동갑이지만 남편이 생일이 2달 빠르다고

자기가 하늘이라며 어른이라 하면서 나를 어린아이 취급했는데

사실은 싫지 않았고 3월 13일 우리는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3살 먹었을 때 누구한테 장가갈래?

하고 어른들이 물으면 나한테 간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3살부터

인연이 되어 연애 끝에 성사됐으니 천생 연분이었습니다.

둘은 결혼하여 한 가정의 맏며느리로 지지고 볶고

끝없이 이어지는 날들은 째는 것이 해소 안 되는데

아버님까지 아프셔서 의료보험이 없을 때라 병원비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일주일에 2백만원이었던 것 기억합니다.

결국은 경희대 병원에서 8개월을 입원하면서 살림을 거덜 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시누 시동생 학교 내 아이들의 교육

만만치 않은데 어린 남편한테 책임지게 하고

성질도 만만치 않은 시아버지 대가족을 짊어진 남편

의료보험이 없을 때 아버님이 대학 병원에 입원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2백만원 계산하는데 치료비를 늦게

가져왔다고 돌아눕는 것을 보고 남편이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버님이 그렇게 원망 스런 적이 없다고 하여 나도 섭섭했답니다.

병원비도 늦게 가져오는데 무슨 동생을 대학 가르치느냐고

벗겨 세우라 하였는데 그런다고 하고 나서 아이들 돌 반지

우리의 예물 다 팔아서 대학 등록금 대고 동생만이라도 고생

덜 하라고 가르치는데 나도 일조하였습니다.

째는 대가족이 함께 살다 보면 얼마나 사연이 많았을까요?

삶을 다 이야기한다면 책으로도 100권은 되겠지만

살면서 웃기도 많이 했으니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닌가 하며

희미하게나마 생각나는 것만 대충 헤아리렵니다.

사연 많고 해결 되지 않은 채로 돌고 돌아 나 살던

고향으로 내려와 막내 시누이가 놀러 와 이야기하다 보니

큰오빠가 너무 째기에 작은오빠를 대학 보내는데 나도 가고

싶었지만 포기했다고 하니 나 혼자 희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연 속에 시부모님은 봉황당에 계시고 나는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온전하지 못하니 불쌍한 남편

뻔뻔한 건지 익숙해진 건지 나를 잊고 살 때가 많아

안보였으며 삶에서 현실만 보기에 건강한 삶을 고르라면

우선 가족들의 마음이 그만하면 만족하였습니다.

생각하면 문화의 차이가 시절을 말해주지만 시집 식구 흉보던

며느리들이 시어머니가 되었으니 인생이란 것이 내일로

가는데 그 세월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어 누가 머라 안 해도

기가 죽는 것은 내 모습도 있지만 나이 때문인 거 같습니다.

괜찮아! 젊은이들이 위로지만 늙은이들한테는 느리게 괜찮어.

이 말이 위로의 말이었으며 아 와 어가 다르다고 젊은이와

늙은이는 말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있었지만 내용이나 뜻은 같은

거였으며 괜찮아! 이 세 마디는 위로의 말이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때늦은 후회가 늙어서까지 후회가 된다는 것을 몰랐는데

그때 공부에 대한 것에 미련을 가지었기에 나중에

내 애들은 무조건 가르치었는데 사실 공부란 것이 제일 싫은

숙제가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괜찮아! 위로의 말도 되지만 아이들이 생각보다 성적이

안 나와도 괜찮아! 이 말이 나이가 드니 괜찮어로

나에게 위로가 되었기에 가장 많이 써먹는 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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