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문화/사회돌아가는 이야기

정치 .제도. 운명.

우리들 이야기 2021. 8. 12. 07:41

정의

불의가 손을 잡지만 정의가 이기었습니다.

양날의 칼을쓰는 검사들이지만 진실을 베지는 못하고

눈비에 쓸려나가면 사실만 남기에

양날의 검보다는 사실이 위에 있었습니다.

비슷한 가제는 게편이라고 검사의 수사를

판사가 판결하여 억울한이가 생기니까 배심원 제도가

필요한데 아직 법개혁이 안 되었지만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고 사법개혁은 하겠지요.

자리를 위해 열심히 줄을 잘서야 하니 입맛대로

죄를 묻고 씌우기도 하니 억울한 이가 나오는데

헌법이 왜 있는것인지 마음대로 써먹는 세상에서

법을 믿을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처다보기도 높은 법의 문턱 개혁은 누가 할런지요.

오래된 정치권들이 더 의심 스러웠습니다.

흘러보내지 않고 오래 가두면 물도 썩는다고

지금의 오래된 물이 자기를 위한

정치로 국민을 속이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정치는 아무나 하나요?

대통령은 시험보는 것이 아니고 됨됨이 살아온 날이

그림자가 되어 사람들이 뽑아주는 것이랍니다.

내 사람 한테는 비밀이야기를 다하는데 내맘과 다르다고

배신하니 누가 나라를 위해 상의 하거나 의논할까요?

자기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사생활 침해한다고

하기에 집에서는 가족만이 가지는 현관문 비밀번호가

있는 건데 이렇게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고 있으니

나쁜 사람들이 배신하는 거랍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을 하기 위해서 잘못도 있는 건데

조조대니 이런 분을 어떻게 어른으로 모실까요.

나이가 들면 세상도 볼줄 알아야지 그게 무었니까?

지금 나랏님은 선한 척 하는 것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을 필요로 한답니다.

아무나 그 자리로 가는거 아니고 가진 것 나라를 위해서

내 놓을 준비가 되어야 하는것이랍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천지 창조를 말씀으로 만드시고

독생자 아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으셨답니다.

다 내어놓아야 가벼워서 날수 있듯이

두가지 다 가질수 없고 한 주먹을 쥐면 한주먹은 펴야 한답니다.

 

법의 제도

옛날에는 모든 것이 부족해서 먹고사는 문재로 쌀이 많으면

부자라고 하였는데 방물장수가 많아 필요한 것은 곡식을 주고 샀으며

오일장으로 필요한 것은 미루었다 장날사고 그런시절에도

정은 있어서 혼자만이 잘살려 하지않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문화속에 인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모든 물질이 풍부해졌지만

저사람을 밟고 올라가려는 경쟁자가 더 많았고

브랜드가 믿음이 되었으니 빈부차이가 더 나며 자본주의 사회서

먹는 것이 아니고 돈이 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똑같이 잘 산다는 어불성설 그러니 법이 필요하고

제도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부자가 죄인이 아니고 돈을 어떻게 벌었느냐가 그 과정이 죄를 묻기도

하고 칭찬해야 하는데 돈으로 입을 막으면 벙어리가

되어서 확실한 것은 동영상이 증명해주고 증인이 되었습니다.

입법 사법 행법이 주어진 나라에서 먼저는 국민인데

하지만 국민들도 자리따라 인정해주는 제도가 잘못되었으니

바꾸려 하는데 찌들어서 털어내도 찌꺼기가 구성원을 만드니 참 힘들겠지요.

지금까지 정해진 자리따라 적폐들이 그렇게 많을 줄 이야

누군가가 잘못을 도려내는 용기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못을 고치라고 있는 것인데 정한 방식에서 하나라도

더 빼먹으려 제도를 안바꾸려 하는 이는 오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건물이나 녹쓸면 버린다고 이제 그만 하치장으로 갔으면.

늙어도 마음은 젊어야 하는데 책임지는 직책이 행세하는 자리로

죄를 짓고도 룰을 알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니 그래서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세상을 선호하지만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겠지요.

 

교육제도

물질만능 시대에 돈이면 다 해결되니 너나 할것없이 기회를 잡으면

어떤식이던 돈을 벌려 하고 자리도 돈벌기 위해 적폐들이 많았습니다.

세계의 최고 대학이라 하버드 대학을 손꼽지만 그곳은 정의롭게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지요.

대학이 절실할때는 꿈의 학교지만 필요없는 나이가 되면 한 개의 대학이었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삶이 따라가니 정의롭게 이기는

제도로 바뀌어야 하는데 과연 그 어려운 법의제도를 누가 할까요?

시대따라 독립군이 애국을 하였는데 우리 어릴때는

국산품 애용해야 애국자 한세월 살아오면서 지금은 디지털로 가고있지요.

대학을 최고의 학벌로 지식인이라 인정하기에 잘 써먹어야 그 빛을 발휘하는데

돈버는 목적으로 대학을 이용했으니 사회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온라인 디지털로 세계 소식이 다 담겼는데 언제까지 학교만 가지고

날리필지 따라가기 벅찬 어른들 교육제도가 바뀌면 모든제도가 자동적으로 바뀌겠지요.

 

<운명>

운명은 만남이었습니다.

숙명은 타고난거라 고치기 힘들다고 해도 운명은 마음이 가는대로 만들어 갔지만

만남의 맺어준 운명이었습니다.

옮겨온 글이지만 한참을 찾은것은 지금이 절실하기에 개혁은 다 때가 있다고 지금이 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의 운명의 책을 보고 어느 미장원 언니 한테 주었는데 미장원이 수리가 들어가서

나중에 그 언니 찾아보니 이미 그곳을떠났다고해서 그만 책을 잃어버려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찾아 반가운 마음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문재인의 운명』은 <노무현재단>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를 비롯한 30년 동행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노 대통령이 생전에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표현할 만큼

신뢰했던 평생의 동지, 문재인의 시각에서 본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증언입니다.

책에선 또, 두 사람의 ‘운명’ 같은 30년 동행을 통해서 본 자신의 삶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과 함께,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 가운데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문 이사장은 책의 서문에서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책을 쓰기로 생각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또 한 정권이 끝나간다. 국민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가 역사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증언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지고 있는

첫 번째 책무는 자기가 보고 겪었고 일했던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훈이 되고 참고가 될 내용을 역사 앞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누군가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었으며, 문 이사장이 처음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함께 노동ㆍ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는

물론 서거 이후 지금까지의 30여년 세월 동안의 인연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 서문]
세월이 화살 같다.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과 이별한 지 어느덧 두 해가 됐다. 그 느낌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를 떠나보낸 날’은 여전히 충격과 비통함이며, 어떤 이들에게 ‘노무현’은 아직도 서러움이며 아픔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은 그리움이고 추억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기고 간 숙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 시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머무를 순 없다. 충격, 비통, 분노, 서러,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 구석에 소중히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방법이다.

그가 졌던 짐을 우리가 기꺼이 떠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다.

 

2주기를 앞두고 사람들이 내게 책을 쓰라고 권했다. 이유가 있는 권고였다. 노 대통령은 생전에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기록으로서 솔직하고 정직해야 하는데, 아직은 솔직하게 쓸 자신이 없다고 했다.

혼자 하기에 벅차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공동 작업을 청했다. ‘함께 쓰는 회고록’으로

가자고 했다. 저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대를 기록해 보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에 당신이 하겠다고 했다.
그 부탁을 했던 분도, 그 부탁을 받았던 우리도 미처 뭔가 해 보기 전에 갑작스럽게 작별해야만 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숙제는, 그와 함께 했던 시대를 기록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을 같이 했고, 지금은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내가 그 일을 맨 먼저 해야 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그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기록을 충실히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하도 엄청나고 많은 일을 겪어, 자료를

보지 않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주저되는 부분도 많았다.

대통령이 고민했던 것처럼, 나 역시 100% 솔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많은 분들이 있는데, 자칫하면 이런 저런 부담을 드리거나 누가 될 소지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쓰기로 생각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또 한 정권이 끝나간다.

국민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가 역사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증언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책무는 자기가 보고 겪었고 일했던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훈이 되고 참고가 될 내용을

역사 앞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보니, 참 오랜 세월을 그와 동행했다. 그 분은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가장

치열한 사람이었다. 그 분도, 나도 어렵게 컸다.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려 했고,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보고자 애썼다.

 

그 열망을 안고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이룬 것도 많고 이루지 못한 것도 많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아쉬움이 많다.

후회되는 것도 있다. 견해의 차이로 마음이 멀어진 분들도 있다. 진보ㆍ개혁진영의 ‘과거 벗’들과도 다소 마음이

멀어진 듯하다. 우리뿐이 아니다. 진보ㆍ개혁진영 안에서도 상처와 섭섭함이 남아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 서거는

우리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줬다. 다음 시대를 함께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모아야 한다. 마음을 모아야

힘을 모을 수 있다.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애증(愛憎)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분은 떠났고, 참여정부는 과거다. 그 분도 참여정부도 이제 하나의 역사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성공과 좌절의

타산지석이 되면 좋겠다. 잘 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 받고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분도

그걸 원하실 것이다. 노 대통령과 나는 아주 작은 지천에서 만나, 험하고 먼 물길을 흘러왔다. 여울목도 많았다.

그러나 늘 함께 했다. 이제 육신은 이별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와 그는, 정신과 가치로 한 물줄기에서 만나 함께

흘러갈 것이다. 바다로 갈수록 물과 물은 만나는 법이다. 혹은, 물과 물이 만나 바다를 이루는 법이다. 어느 것이든

좋다. 이 같은 나의 절절한 마음을, 내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이 한 편의 시에서 어쩌면 그리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 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이 땅의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결국은 강물이 되어 다시 만나고,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뤄 함께 흘렀으면 좋겠다.

강물은 좌로 부딪히기도 하고 우로 굽이치기도 하지만, 결국 바다로 간다.

장강후랑최전랑(長江後浪催前浪)이라고 했던가. 그러면서 장강의 뒷물결이 노무현과 참여정부라는 앞물결을 도도히

밀어내야 한다. 역사의 유장한 물줄기, 그것은 순리다. 부족한 기록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마뜩찮아 하던 나를 설득해 책을 내도록 권고한 분들이 꽤 많다.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방대한 양의 내 녹취와 증언을 꼼꼼히 정리하여 자료로 만들어 주느라

고생한 양정철 전 비서관에게 특히 고마움을 전한다. 그 작업이 없었으면 나는 책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원고를 자신의 것인 양 정성껏 봐주고, 의견을 주신 분들의 노고도 고맙기만 하다. 책을 완성해 준 <가교출판>

식구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모든 분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노 대통령 2주기에 맞춰 발간해, 그 분 영전에 헌정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열심히 정리했지만 부족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이 책이 그 분이 바랐던 ‘함께 쓰는 회고록’의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그 분과 함께 했던 다른 분들의 알찬 기록이 속속 나오기를 기대한다. 2011년 6월 문 재 인

 

[책속으로 추가]
Ⅱ. 수사 전후
■ 한 번도 화내지 않고 달관한 것처럼 끌어안아 그 시기 대통령은 좀 이상했다.

당시 대통령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다가, 사실관계 파악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같이

사실관계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평소 같으면 굉장히 야단을 치고 화를 내실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우리 앞에서는 큰 소리 한번 안 치셨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도저히 달관할 수 없는 일을 달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장래에 대해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사람과

정상문 비서관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오래 정치를 하면서

단련이 됐지만, 가족들은 단련시키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

 

대통령은 여사님뿐 아니라 정상문 비서관에 대해서도, 비록 당신 모르게 벌어진 일이지만 모두 끌어안으려 했다.

정상문 비서관에게는 당신이 시켜서 한 일로 진술하라고 시켰다. 정 비서관은 대통령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글을 써서 당신이 한 일이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얼마 후에는 다시 글을 올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

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대통령은 우리를 보는 일조차 민망해 하고 면목 없어 하셨다.

내게 그런 심정을 직접 토로하기도 했다.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했던 분이 당시 상황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변호인단 모두 무죄 확신…그래서 서거 더 충격 그 날까지의 과정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지, 막상 검찰이

기소를 하고 나면 법원에서의 승부는 자신을 했다. 검찰과 언론이 아무리 ‘여론재판’, ‘정치재판’을 해도, 법은 법이다.

수사기록의 부실함을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리한 수사나 조작은 한계가

있다. 그 사건이 그랬다. 이길 수 있었다.
검찰의 대통령 소환 조사는 마지막 수순이었다. 그러면 곧바로 신병처리를 하든가, 불구속 기소라도 하든가, 아니면

무혐의 처리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검찰 조사가 끝난 이후에도 아무 처리를 못한 채 질질

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찰도 공소유지가 될 지에 대한 판단을 해 봤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영장을 청구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이 그 동안 해왔던 모든 수사가 무너져버리는 셈이 된다. 불구속기소를 하더라도 공소유지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무 처리도 못하고 끌기만 한 것이다. 언론을 통한 모욕주기와

압박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이나 변호사들 모두, 검찰이 기소하더라도 무죄를 받는 것엔 문제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이 그렇게 자신을 모두 던져 버릴 결심을 하고 계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 가난하게 떠난 대통령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 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 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Ⅲ. 참여정부 비화

 

■ 첫 조각 뒷얘기
최대 파격은 강금실 법무부장관이었다. 당시 판사를 거쳐 민변 부회장을 하고 있던 강금실 변호사를 추천한 건 나였다. 내 추천은 그녀를 법무부장관으로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여성 장관을 발탁해 온 방식대로 환경부장관이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인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묻더니, 그렇다면 법무부장관으로 하자고 했다. 내가 깜짝 놀랐다. 너무 부담이 컸다. 환경부나 보건복지부 쪽을 먼저 맡겨 본 다음에, 법무부 쪽을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다. 당선인은 생각이 달랐다. 여성 몫으로 환경부, 보건복지부, 여성부 또는 교육부를 벗어나지 못했던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성 전유물처럼 생각돼왔던 자리에까지 여성들을 과감하게 발탁해야 한다는 게 당선인의 뜻이었다. 대통령의 여성관은 진취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씬 더 능력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당선인은 국민의 정부 마지막 환경부 장관을 했던 김명자씨를 건설교통부 장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여성의 적극적 발탁 의미와 함께 환경마인드에 입각한 건설행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새만금사업과 경인운하 등이 큰 사회적 갈등요인이어서, 건설과 환경의 조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 고건총리 내정자와의 협의과정에서 불발로 끝났다. 여성의 본격적 발탁이라는 당선인 의지는 참여정부 출범 후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 최초 및 복수의 여성대법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순으로 이어졌다.

 

■ 검찰과의 관계
우리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려면, 검사들이 정치적 줄 세우기에 따르지 않아도 되도록 신분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검찰총장의 임기보장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에도 이전 정부에서

임용된 김각영 검찰총장을 교체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김각영 총장이 내게 대통령의 의중을 물어온 일도 있었다. 전혀

그런 뜻이 없으니 임기를 지키시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당시 검찰 고위급 간부들은 단단히 오해를 하고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새 정부가 과거 식의 인사로 자신들을 모두 밀어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대통령과 우리는 검찰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즉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이 목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검찰 스스로 정권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는 ‘문화의 문제’로 봤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직간접으로 당신의 그런 의지를 전달했다. 민정수석실도 검찰에 주요 사건의 지시 내지는 조율을 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철저하게 견지했다. 대선자금 수사로

대통령 측근들에게까지 수사의 칼날이 와도 검찰이 원칙과 소신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모두 허용했다.

우리 쪽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검찰수사의 독립성과 중립을 보장해 줬다.

그렇게 마련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앞으로 검찰 스스로 잘 지켜나가길 원했다.
검찰을 장악하려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 반기문 총장이 나오기까지
대통령과 청와대가 처음부터 반 총장을 염두에 두고 외교적 노력을 했던 건 아니다. 당초엔 홍석현 주미대사가 그 자리를 꿈꿨다. 차기 사무총장은 아시아 몫이라는 공감대가 있을 때여서 본인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 ‘안기부 X파일’ 도청테이프 사건이 생겨 돌연 낙마했다. 그 바람에 반기문 장관이 후보가 됐다. 반 총장으로선 어찌 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다. 참여정부는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을 다 했다. 대통령은 모든 순방외교에서 그의 지지를 부탁했다. 총리의 해외방문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을 주요국에 특사로 보내, 지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임박해서는 다른 국가원수들에게 전화도 많이 했다.
그런 노력들이 효과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고위급 외교전이 아니었다. 범정부적인 외교노력은

마지막 단계에 꽃을 따는 과정에 불과했다. 반 총장의 당선이 가능했던 건, 당시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균형외교 정책 때문이다. 대통령은 반 총장 선출소식을 듣고 아주 반가워했다. 축하전화로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당신이 그렇게 공을 들여 빛을 본 일이라 생색을 낼 법한데도 청와대나 부처에 그리 못하도록 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기울인 그간의 노력이나 비사(秘史)도, 정부가 생색을 내거나 자축하는 일정도 절제토록 지시했다. 심지어 KBS가 나라의 경사라며 마련한 <열린음악회>조차도 정부는 함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그가 국제지도자로서 소신껏 일을 하도록, 편하게 놔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정부가 생색을 내면 낼수록 그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깊고 세심한 마음 씀씀이였다. Ⅳ. 회고와 희망

 

■ 2012년 집권을 생각하며
진보ㆍ개혁진영의 집권을 위한 통합 또는 연대가 논의되고 있다. 지난 4?27 재보선은 야권후보 단일화의 위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해 온 단일화 방식의 한계도 보여줬다. 정당간의 경쟁을 통한 단일화 방식은, 단일화 자체도 늘 진통을 겪게 마련이거니와 단일화되더라도 자칫하면 시너지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나는 통합이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경우 민주당과 다른 정당들 간에 존재하는 현저한 힘의 격차가 충분히 고려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정당의 입장에서 볼 때 통합은 곧 민주당에 의한 흡수 소멸이란 의구심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
통합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것은, 집권 후를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단일화만으로는 집권 후의 분열을 막기 어렵다. 단일화야 한나라당의 계속 집권을 막기 위한 공동의 목표만으로, 또는 최소 강령의 합의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집권 후의 공동보조를 계속하기는 어렵다. 집권 후에도 함께 힘을 모아 개혁의 동력을 유지해 나가려면 더 높은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 사회 정치지형에서 진보적 성향이 다수를 이뤄 진보ㆍ개혁진영 안에서 헤게모니 싸움을 벌여도 대세를 그르치지 않게 될 때까지는 통합된 정당의 틀 안에서 정파 간의 연립 정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 민주노동당이 추천하는 인사를 노동부장관으로 입각시키고 싶어 했다.
민노당이 추천한 인사라면, 그가 당적을 유지한 채 개인적으로 입각해도 좋다고 했다. 참여정부 노동정책이 노동계로부터 안정적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고, 민노당도 국정경험과 함께 보다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이 과반수가 되고 민노당도 크게 약진했을 때부터였다. 두어 번 개각 때마다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당시 우리 정치문화에서 민노당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선 민노당 당원들이 용납할 리 없었다. 당 지도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당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 뻔했다. 우리도 정치공작이나 야합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와 같은 강고한 벽을 뛰어 넘기 위해서도 통합과 연립정부를 처음부터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속으로 Ⅰ. 서거 전후

■ 노 대통령 시신 참혹…유족 충격 고려 사전 수습
- 사실상 현장에서 서거…‘09:30’은 법률적 시점
병원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있는 문용욱 비서관의 표정이 참담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대통령님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특실에 모셔져 있었다. 얼마나 안 좋은 상태인지 눈으로 봐야 했다. 병실에 들어섰다. 눈을 감고 말았다.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처참한 모습이었다.
의료진들이 사실대로 알려줬다. 인공심장박동으로 연명하고 있어 신호가 잡히는 것이라 했다. 장치만 제거하면 신호는 바로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도 ‘행여나…’ 하는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의사가 더 분명하게 말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의학적으로는 사망한 상태였고, 중간에 들렀던 ‘세영병원’ 소견도 같다고 했다. 대통령님 상태로 보면, 사고현장에서 바로 돌아가신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인공 심장박동 장치는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처치를 다해주길 바랄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가족들이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붙여놓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담당 의사가 말했다.
“여사님이 오시면 전혀 가망 없는 상태라는 걸 말씀드리고 동의를 받아 인공연명장치를 제거해야 합니다. 저희가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니, 실장님이 먼저 좀 말씀해 주십시오.”
곧 도착하실 여사님께 대통령님 모습을 어떻게 보여드릴 것인지가 먼저 걱정됐다. 의료진에게 그 걱정을 말했다. 그들도 공감했다. 의료진들은 얼마 후 도착한 여사님을 기다리게 하면서, 황급히 손을 써 줬다. 여기저기 찢어진 부분을 모두 봉합하고 피도 깨끗이 닦아냈다. 시신을 어느 정도 수습하기 전, 참혹했던 모습 그대로를 본 건 경호관과 문용옥 비서관과 나 밖에 없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여사님이,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겨우 부축을 받아 대통령님을 만났다. 거짓말처럼 깨끗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아무 상처가 없었다. 표정이 온화하기까지 했다. 여사님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실신을 했다. 불과 두 세 시간 전까지 함께 있던 남편의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여사님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설명 드리는 것이었다. 여사님은 그냥 ‘산에서 떨어지셨는데 좀 위급하다’ 정도로만 알고 달려오셨다. ‘세영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 없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라는 짐작만 하고 계셨다. 비서들이 차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씀드렸다.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리셨다고. 못 믿으셨다. 유서를 보여드렸다. 여사님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 했다. ‘인공심장박동 장치에 의존하고 있을 뿐, 의학적으로는 이미 돌아가신 것이다, 전혀 가망이 없다고 한다, 인공연명 장치를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여사님이 결심하셔야 한다, 그냥 가시도록 놓아드리자…. 의료진도 확인을 해줬다. 여사님의 오열과 통곡 앞에서 나도 나를 가누기 어려웠다. 고통스런 일이었다. 실신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던 여사님께서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신 후에 동의를 했다. 인공심장 박동기를 제거했다.
2009년 5월23일, 오전 9시30분이었다. 그 분을 떠나보냈다.

 

■ 유서 첫 문장 나중에 추가…마지막 순간에도 글 손질
유서를 처음 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나를 못 견디게 했던 건, 이분이 ‘유서를 언제부터 머리에 담고 계셨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다듬을 수 있는 글이 아니므로, 대통령은 아무도 몰래 머리속에서 유서를 다듬었을 것이다. 첫 문장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는, 나머지 글을 모두 컴퓨터에 입력한 후 추가로 집어넣었다. 그답게 마지막 순간에도, 입력한 유서를 읽어보고 다시 손을 본 것이다.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동안 머리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으리라는 생각이 지금도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홈페이지에

“여러분은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려도 나는 대통령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운명이란 책을 읽었지만 다시 이곳에서 글을 보니 대통령이 되기까지 운명이었습니다

가난과 싸웠더 그들 돈이 없어 한번에 척  사법고시에 학격하지는 못했어도 인권 변화사로

한 마음이 되어 민주로 가는 길을 트기시작하였습니다. 

도랑물이 흘러가서 냇가에서 만나고 냇물이 흘러서 강으로 강물이 흘러서 바다서 만나면

찌꺼기는  걸러지고 맑은 물이 만나듯이요.

 

 

 

 

성장기

문재인은 1953년 경남 거제의 피난민 가정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은 원래 함경남도 흥남에서 살았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나 거제 피난민

수용소로 내려왔다.

문재인은 거제 피난살이 시절 태어났으며 문재인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에

부산 영도로 옮겼다. 아버지 문용형은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일할 당시

공산당 입당을 강요받으며 괴롭힘을 당해 거제에서는 장사로 생계를 꾸리려했으나

빚만 잔뜩 졌다고 한다. 일곱살 때 태풍 '사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가버리기도 했다.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부산의 명문인 경남 중·고등학교를 나오며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술 담배를 하다 유기정학을 맞기도 했다.

문재인은 "중·고교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며 "빈부격차가 확연한 경남중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 세상의 불공평함과 위화감을 피부로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1년 재수 후 경희대 법학과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5년 전국적으로 유신 반대투쟁이 본격화되자, 문재인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고, 유신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경찰에 구속·수감됐다. 재판에서 징역 2년을 구형받았으나 징역 10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영 영장이 나와 강제징집됐다. 군에서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되어 폭파병으로 훈련을 받고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과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는 등 특A급 사병이었다.

1978년 제대했으나 학교에서는 제적된 상태였다. 제대 직후 아버지가 5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문재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에 49재를 치르자마자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들어가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으나,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 당한 후 '서울의 봄'이 오자 1980년

3월 학교에 복학했다.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서 학원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투쟁 중 2차 시험을 봤고,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발표한 5월 17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된

상태에서 유치장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후 수사가 유야무야되며 석방됐다.

사법연수원에서는 고 조영래 변호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박병대 대법관 등을 만났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지만 지망했던 판사가 될 수

없었다. 운동권,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대학 시절부터 만난 김정숙 씨와 결혼했다.

변호사가 되기로 한 문재인은 로펌의 제안도 있었으나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갔다.

인권변호사

1982년 문재인은 부산에서 연수원 동기 박정규의 소개로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던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부산 서구 부민동 법원 후문 근처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둘은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이미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변론을 맡은 바 있었고, 문재인이 합류한 이후 이들은 부산은 물론 울산·창원·거제 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인권변호사가 됐다.

문재인과 노무현은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재야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노무현은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은 상임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6월 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며 자긍심을 드러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노무현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문재인은 부산에 남아 혼자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 1995년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법무법인 부산'을 설립했다. 문재인은 직접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고

부산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노동문제를 상담하고 노조설립 활동을 지원하는데 집중했다.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문재인은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다.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기용됐다. <운명>에 따르면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제안했을 때 문재인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노무현은 "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라고 했고, 문재인은 민정수석으로 끝내고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가지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고 한다.

문재인은 당시 열린우리당에서 총선 출마 압력이 거세지자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상의 문제를 이유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네팔로 여행을 떠났다.

연락을 끊고 지내던 중 네팔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영자신문을 통해 노무현의 대통령 탄핵 소식을 알게 되어 즉시 귀국했다. 탄핵심판 과정에서는 대통령 대리인단 간사를 맡아 실무적 역할과 언론 대응을 진행했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복귀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다시 민정수석을 거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노무현 정부 말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왕수석'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엄격한 자기 절제로 특별한

문제 없이 청와대 보좌 업무를 마치고, 2008년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 칩거했다.

그러나 문재인은 노무현의 서거 이후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국민에게 직접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국장을 이끄는 '상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장례실무를 도맡았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당시 대통령 이명박에게 한 의원이 '사죄하라'고 항의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0년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며 정치권과 거리를 뒀으나 정치권에서는 줄곧 '역할론'이 제기됐다. 문재인은 노무현 서거 이후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표현했다.

첫번째 대선 출마

문재인은 2011년 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하고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55%의 득표율을 얻어 새누리당의 손수조 후보(43.76%)를 제치고 당선됐다. 보수 정당이 항상 강세를 보여왔던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된 첫 번째 민주당 후보다. 2012년 6월 17일 문재인은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는 민주통합당 국민경선에서 손학규·정세균·김두관 등을 꺾고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 이후 통합진보당 이정희, 진보정의당 심상정이 후보직을 사퇴하고 무소속으로 나섰던 안철수와도 어렵사리 후보 단일화를 이뤄 야권 단일후보로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지지자들 손잡는 문재인

18대 대선을 하루 앞두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서울역 광장에서 연설을 마친뒤 시민과 지지자들의 손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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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거결과 문재인은 득표율 48.02%(득표수 1469만표)로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의 득표율이자 득표수를 얻었지만 51.6%(1577만3128표)를 확보한 박근혜에게 밀려 패배했다. 문재인은 2013년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책을 펴내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문재인은 2015년 2월 8일 민주당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나서 초선의 당대표가 됐다. 그러나 두달 만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당내에서 리더십 논란이 불거졌다. 문재인이 통과시킨 '공천혁신안'에 반대한 안철수 등이 12월 이듬해 4.13 총선을 앞두고 대거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문재인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쪽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세우고 표창원, 박주민, 양향자 등 색깔이 뚜렷한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선거 결과 수도권은 물론 부산·경남에서 1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두번째 대선 출마

박근혜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문재인은 충남지사 안희정, 성남시장 이재명, 고양시장 최성 등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출마했다.

문재인은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전체 투표수 164만2640표 중 누적 득표율 57%(93만6419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누적 득표율 50%를 넘어 결선 투표로 가지 않고 본선으로 직행했다. 2위는 누적 21.5%(35만3631표)를 얻은 안희정, 3위는 누적 21.2%(34만7647표)를 얻은 이재명, 4위는 0.3%(4943표)를 얻은 최성이 차지했다.

문재인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저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지역 통합, 세대 통합,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국민 통합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경제와 안보 무너진 두 기둥을 바로 세우겠다. 불공정, 부정 부패, 불평등을 확실히 청산하겠다. 연대와 협력으로 통합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이후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41.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공약

일자리

문재인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 중 첫번째 공약으로 일자리 공약을 내세웠다. 문재인은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 창출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민·관 협업체계 구축 등으로 4차 산업혁명 선도 △실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인상 등을 이행 방안으로 제시했다.

 

정치개혁

문재인은 대통령 특권을 국민에게 반납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정부청사로 이전 △저도 반환 △ 대통령의 24시간 공개 △ '인사추천 실명제' 등 대통령 인사시스템 투명화 △대통령 직속 경호실 폐지, 경찰청 산하 '대통령 경호국'으로 위상 조정 등을 약속했다. 또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및 검경수사권 조정 등을 통한 검찰 개혁과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보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하고 해외안보정보원으로 개편하는 국정원 개혁안을 내놨다.

 

안보

문재인은 △ 한미동맹 강화와 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협력을 통해 북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방산비리 근절과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 구축 등 자주 국방력 확보 △첨단 무기체계 도입으로 과학군·기술군 중심의 강한 군대 육성 등을 공약했다. 또 장병 급여를 최저임금의 30%, 40%, 50% 식으로 연차적으로 인상하고 모든 상해 장병에게 부상의 경중과 관계없이 민간병원 치료비를 전액 보상하겠다고 밝혔다.

청년

문재인은 2020년까지 향후 3년간 한시적으로 청년고용의무할당제를 적용해 공공부문을 현행 3%에서 5%로 확대하고, 의무 고용제 성실 이행 기관·기업에 인센티브, 불이행 기업에 고용분담금을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다, 또 △ 청년임대주택 30만호 공급, △부당 업무지시 제한 근거 마련, 정신적 학대 금지 등을 명시한 알바 존중법 도입 등도 약속했다.

 

여성

문재인은 △여성가족부 기능 강화,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 △출산휴가 등 비정규직 여성 차별 금지 · 블라인드 채용제 도입 등 여성 일자리 차별 해소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여성 관리자 비율 확대 △'여성폭력기본법(가칭)' 제정 추진 등 젠더 폭력 방지 등을 약속했다.

 

노인

문재인은 현재 월 10~20만원 차등지급되는 기초연금을 차등없이 30만원 균등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노인 일자리 수를 현재의 2배 수준인 80만개로 확대하고, 월별 일자리 임금을 2020년까지 현 22만원에서 4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그외에도 △국민연금·퇴직연금을 통한 노후소득 보장 강화 △노년 건강 증진사업 확대 등을 약속했다.

 

육아

문재인은 '교육·육아 국가책임제' 공약을 내놓았다. OECD 평균 수준의 교육재정을 투자하고 유아에서 고등학교까지 공교육 비용을 국가가 책임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초등학교 전학년 돌봄 교실 확대 △만12세 이하 맞벌이부모 자녀 대상 찾아가는 '아이돌봄서비스' 확대 및 내실화 △국·공립 어린이집 이용 아동 기준 전체 대비 40% 수준까지 확대 등과 △배우자 공동 출산 휴가 기간 유급 10일, 무급 4일로 확대 △육아휴직 급여 인상 등을 약속했다.

 

경제

문재인은 중소·벤처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확대 신설하고 △창업투자회사 설립을 위한 납입 자본금을 완화 △연대보증제 폐지 등을 약속했다. 또 △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의 권리금 보호 대상을 확대하고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제도 도입 △ 퇴거 보상제 도입 등 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환경

문재인은 청와대 중심의 재난대응 콘트롤 타워를 구축하고 국가위기관리 매뉴얼을 복구 및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지방자치단체, 경찰, 소방, 해양경찰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국가 재난관리능력을 강화하고 △소방방재청과 해양경찰청을 독립시키고 △재난대응의 지휘·보고체계를 단일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노후 원전 폐쇄 · 신규 원전 전면 중단 등 40년 후 '원전 제로 국가'가 되기 위한 로드맵 마련을 약속했다. 30년 이상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또는 친환경 연료로 전환해 임기내 국내 미세먼지 배출량의 30%를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옮겨온글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 삶과 신앙

“세상 안에서 하느님 뜻 실천해온 참 그리스도인”
소년 쁘레시디움 활동하며 복사 도맡아 인권 변호사 시절 부산 정평위 활동 참여
‘신귀영 일가 간첩 누명’ 변호 나서는 등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주님 사랑 실천
5월 10일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익히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라면 ‘참 신앙인’이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머니 ‘기도(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통령선거에 앞서 3월 19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내 경선 후보 토론회 때 내놓은 말이다. 스스로도 주위에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수없이 고백하듯 밝혀왔다.
1962년 문재인 대통령의 첫영성체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문 대통령.문재인 대통령 가족 제공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문 대통령은 어머니 강한옥(데레사·90·부산 신선본당)씨 권면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 1961년 신앙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세례명 ‘티모테오’도 어머니 강씨가 직접 정한 것이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그의 세례명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어머니의 깊은 관심과 인도 속에 신앙생활에 맛을 들여가던 소년 문재인은 초등학교 5~6학년시절 본당에서 소년 쁘레시디움 활동을 하며 미사 때마다 복사 서는 일을 즐거움으로 알았다. 성당 마당에서 뛰놀던 이때의 추억은 신앙인 문재인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걸어가는 데 원체험이 됐다.
어머니 강한옥(데레사)씨는 “특별한 게 없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 그냥 보통 사람이지”라고 오랜 세월 지켜봐 온 자신의 아들을 증언한다.
아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고 ‘주님을 공경하는’ 보통 사람, 보통 신앙인의 모습을 잃지 않길 바라는 노모의 기도가 오늘의 그를 만든 게 분명해 보였다.
입시에 매달려야 했던 중학교 진학과 함께 잠시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머니가 그를 붙들어 세웠다. ‘하느님 공경’의 길이 어떤 길인지 잘 아는 어머니였다. 본당에서 레지오 단장, 구역장, 사목협의회 부회장, 신협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교회일이라면 딴일 제쳐놓고 나서던 어머니는 아들 재인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삶의 푯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되뇌게 했다.
문재인·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두 사람을 이어준 송기인 신부(부산교구 원로사목자)는 “당시 문 변호사는 이미 신앙적으로 잘 갖춰진 그리스도인이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웬만한 성직자보다 나은 참 신앙인”이라고도 평했다. 그는 “예수님처럼, 발걸음 하는 데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며 신앙인 문재인의 가려져있던 면모를 드러냈다.
학생운동 속에서 정의를 찾으며 주님 진리에 목말라하던 청년 그리스도인 문재인이 다시 신앙의 열정을 불사르기 시작한 것은 사법고시(1980. 제22회)에 합격하고 1982년 부산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합동법률사무소를 열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인권 변호사’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부산·울산·경남 지역 전체에 인권 변호사라곤 그를 포함해 고작 서너 명이 전부였다.
함께 일하던 노무현, 김광일 변호사 등이 차례로 정치무대로 떠나자 끝까지 가난한 이들 곁을 지킨 이도 그였다.
1981년 부산 신선성당에서 혼인성사 후 미사 집전사제들과 기념촬영한 문재인·김정숙 부부. 뒷줄 왼쪽부터 주례 사제인 배상섭 신부, 김남수 신부, 고 박문선 신부.문재인 대통령 가족 제공
청년 문재인은 1988년 처음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하 부산 정평위) 위원으로 위촉돼 2000년대 들어 정치무대로 떠날 때까지 신앙인으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 시기 문 변호사는 부산 정평위 산하 법률인권팀(팀장 김현영 신부) 소속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는 일을 마다치 않았다.
1988년 11월 14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하 천정연)이 창립되고 천정연 산하에 인권소위원회(소위원장 하경철 변호사, 지금의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앞장선 이도 그였다.
1987년 6월 27일 부산 범일성당에서 봉헌된 이태춘 열사 장례미사 후 고인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노 대통령 왼쪽).부산교구 정평위 제공
한창 부산 정평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1994년, 외항선원이던 신귀영씨와 친척들이 불법 감금과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렸다가 29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신귀영 일가 간첩조작사건’을 빛 아래 드러낸 것도 문 변호사의 정의감이 낳은 결실이었다. ‘간첩사건’이라면 누구나 꺼리던 시절, 그는 자비를 털어 일본을 오가며 신씨 일가가 쓴 누명을 벗기는 일에 앞장섰다. 누가 부탁한 일도,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 길이 정의의 길이라서 나선 것뿐이었다.

훗날 신귀영(81)씨는 “자기 일도 아닌데…. 그는 실망시키지 않고 계속 싸워주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 덕분에 참 안도감이 들었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정이 한 사람, 나아가 그에 딸린 수백 명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1996년에는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의 주범들을 변호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하느님이 주신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부산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부산지부와 경남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앞장 선 그가 부산지역 법조인들을 모아 성서모임을 이끈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 성서모임에는 동료 변호사들뿐 아니라 지역 판사와 검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함께한 김현영 신부(부산교구 김해이주노동사목센터)는 “문재인 대통령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인 참 신앙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을 알기에, 그분이 명하신 사랑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길에 들어선 문재인 의원이 지난 2014년 8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10일간 단식한 일은 그가 걸어가고자 하는 삶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세속의 평보다는 주님이 보여주신 길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다.
2015년에는 주교회의가 앞장서 온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을 공동 발의하는가 하면, 한국 평협이 추진하고 있는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에 동참해 힘을 보태기도 했다. 2016년 고(故) 백남기(임마누엘) 농민 장례미사에 참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며 내세운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 금지·핵발전소 백지화 ▲탈핵국가 로드맵 제시 ▲호스피스·완화돌봄 정책 확산을 위한 지자체의 기반시설 확충 ▲사형제도 폐지 등의 공약은 그의 신앙 역정을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믿음이 간다.
신귀영 일가 간첩조작사건’ 재심 청구를 위해 1994년 5월 16~20일 일본을 방문한 문재인 변호사 일행이 신씨의 형 신수영씨와 가족을 만나 조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부산교구 정평위 제공

■ 문재인 대통령 발자취

▲ 1953.1.24. 경남 거제 출생. 2남3녀 중 장남
▲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 1972 경희대 법대 입학
▲ 1975 반유신 학생운동으로 구속, 대학 제적
▲ 1980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 1982 변호사 개업(고 노무현 대통령과 합동법률사무소, 인권변호)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 1995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민변 부산·경남지부 대표
▲ 2003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참여정부)
▲ 2004 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
▲ 2005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 2007 대통령 비서실장,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 위원장
▲ 2009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 2010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 2012 제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
▲ 2012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 2015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 2016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 2017. 4.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후보
▲ 2017. 5. 10.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당선

[교회 내 활동]
▲ 1961 부산 영도 신선성당에서 영세
▲ 1981 김정숙 여사(골롬바)와 부산 신선성당 혼인성사
▲ 1988~1995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 1988~현재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 2002. 10. 31. (사)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
▲ 2012 국회가톨릭신도의원회,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에 관한 청원 제출
▲ 2014. 8.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10일간 세월호 유가족과 단식
▲ 2015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 공동 발의
▲ 2015 한국평협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 동참
▲ 2016 고(故) 백남기 농민 장례미사 참례

 

 

 

참으로 문재인의삶은 노무현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문재인은 가난해서 대학 진학이 힘들었지만 4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간다.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징집 당해 특전사에 끌려갔으나 특전사 체질이다 군대 체질이다 놀림을 받을 정도로 잘 적응해낸다. 사법고시 합격증을경찰 유치장에서 받고, 사법연수원차석이나 운동권 전력으로 판사임용을 못받고 돈 안되는 인권변호사가 된다. 사회적 약자를 묵묵히 도우며 친구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법조인이다 보니 남을 설득해 내는 기술이 글솜씨로 그대로 진솔하게 녹아들어 살짝 감동을 준다. 운명이다에서 마지막 대목이 압권인데, "노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사라지는 그이름

스스로 빛을 내던 사람이 자기의 길을 잃고 헤매면서
남 얘기만 하는데 원망만 하다보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악날한 독설을 뱉는 한사람 공부잘하면 지식인이라고

하는데 세상은 그런사람 택하지 않고 좋은 사람들을 부른답니다.

근데 언젠가부터 자기 본분을 잃어버린체 맞지 않은 옷을입고
대낮에 빛을 반사하기에 관심도 없고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본모습이

그림자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존재내 생각과 안맞는다고

티비에 나와서 욕하니 더 인정도 안해주고 욕만 나게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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