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나의 글/인생 이야기

남편

우리들 이야기 2023. 3. 7. 07:49

 

남편

추억ㅎㅎ<삼촌과 조카> 

옛날에는 며느리와 같이 아이를 낳았기에 삼촌보다 한 살 어린 조카가

더 어른스러웠고 장손인 조카는 착하기도 했지만 공부도 잘하여 할아버지

귀염을 독차지 하였고 시골이라 농사를 짓고 소를 먹이는데 꼴 베고

논두렁도 만드는 것을 조카가 잘하니 데리고 다니며 시키었다지요.

식구가 많아 물지게를 어깨에 메고 나무를 잘해서 이래저래 할아버지 

귀여움을 받았다니 타고난 천심인가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조카는 삼촌과 

나무를 하러 가서 조카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짐을 해서 지고 내려

오는데 몆 가지 나무를 지고 오다 쉬면서 무거워서 못가니 내 것도 지고 

가라 하여 나뭇짐은 소복했지만 삼촌은 빈 지게를 지고 달음질쳐

내려갔고 삼촌이 친구들과 싸우는 걸 보면 조카가 달려가서 한편이

되어주었으며 삼촌과 조카 중학교를 들어가는데 조카는 학격 했지만 

삼촌은 떨어져서 먼데 있는 학교 후기로 갔으며 형편이 어렵다고

가지 말라는 고등학교를 돈 안들이고 가려 먼저 국비생으로 들어간

선배 하숙집에서 하루를 보내며 시험을 치어보려 하였답니다.

그 선배가  멋있고 잘생기어 여자들이 좋아했나?.

그날 밤 두 여자가 찾아왔는데 선배는 관심도 안 두고 함께 간 동료들 2명

막걸리 코가 삐뚤 어 지게 마시는데 한쪽에서는두 여자가

머리채를 잡고 싸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배는 내버려 두었으며 

중 3 학년 술을 처음 마시는 학생들 그냥 취한 채로 잠들었고 

취기가 남은 채로 다음날 시험을 보는데 며칠 전 라디오에서 대통령이

해외 가는 곳을 특보로 나왔는데 마침 그날 시험문제에 

대통령 방문한 나라 이름이 나와서 운 좋게 시험을 잘 치렀답니다.

선배네 집에 합격자 발표 나올 때 까지 있을 수 없고 또 시골과

서울의 열차차비 아끼려고 누나가 서울에서 양장점 디자이너로 있어

그곳에 묵으려고 했는데 거기도 누나들 3명이라 잠잘 곳이 없어 

다시 선배네 집으로 왔으니 측은한 어린 중학생 마음이 보이네요. 

그곳에도 선배 여자가 찾아와 할 수 없이 아는 친구 집에 신세지고

다음 날 합격자 발표에 이름이 나와서 좋았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하나 어린 마음이라 두려웠고 국비생 시험이라 20대 1인데

합격해서 기뻤지만 아버지 사업실패로 어려운 것을 알기에 

과외를 하면서 먹는 것은 해결되었는데 그 어려운 고등학교를

조카는 국비생으로 들어가 2학년이 되었는데 삼촌은 일반으로 1학년.

먹는 것도 해결하기 어려운 시대 공부하기 위해서는수업료가

문제라 과외 선생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적이 남편에게도 있었답니다.

서울에 있는 학교 간다면 유학이라고 하던 시대 입이라도 해결

하려고 국비생이라 돈은 안 들어가지만 한참 때 먹는 것 부실해서

실컷 먹고 싶어 중학생을 가르치었다는데 아버지는 일찍 죽고

엄마는 나가고 할머니가 키우다가 작은아들이 살림을 가지니 그 집에

손자를 데리고 들어갔다는데 그때만 해도 시집살이 하던때라

며느리가 조카를 키우면서도 눈치 보던 때기에 할머니 손자 사랑은

끔찍했기에 공부를 가르치다 선생님! 먹을 거 뭐 드시고 싶으세요?

묻고 집에 있는 거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남이 가게 가서

훔쳐 와 얼마나 잘 훔치는지 들키지도 않아 잔뜩 가져왔답니다.

마트에서는 머 사러 온 척하다 다른 손님하고 물건을 팔면 

그사이 가져오기에 일찍 오는데 군 고구마 먹고 싶다면 한참 걸려야

한다며  고구마는 주인이 화장실 갈 때를 이용해서 훔쳐 오는것이라

오래 걸린다니 먹고 싶은 욕구에 모르는 척했다는데 생각하니 공범.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잡히면 할머니가 간단하게 합의 보아 나와서 

다시는 안 해야 하는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하고 또 하고 훔치는

데는 도가 터서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라 한두 사람이 그런 게 아니고 

좀 도둑이 많을 때라 그러려니 하며 합의도 쉽게 보았다지요.

옛날 좀도둑이 세월 타고 지금은 큰 도둑으로 이익이 되는 거라면 

무어던지 서슴지 않고 힘 있는 자들은 큰 도둑이라도 빠져나가니

공평하지 않은 세상 과외가 학원으로 머리를 돈 주고 사는 시대라도 

여전히 배고픈 사람들이 있어 허기를 달래려 작은 빵하나 훔치고서도

감방을 가야 하나 힘없고 작은 이들이 도둑을 못 면하고 형편 따라

사람은 변한다니 잘 훔치던 그 애는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되어 

머 장관하는지 감사장이 되었는지 아부를 잘해서 사람 들을 잘 꼬시는지 

여전히 도둑질하는지 궁금하지 않아도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의 한폐지래요.

누나가 양장점 재단사로 있어도 삼촌과 동생 돈이 많이 들어

해결 못하니 1년 후에 집에서 내려 오라는 통보를 받았답니다.

그때 버티고 있었으면 지금 군인연금이 제법 많을 텐데 한 살 더 먹은 

삼촌 때문에 늘 조카는 손해를 보았고 어른 들 말을 거역 못 하는 

조카는 고등학교를 한 학기 남겨놓고 삼촌 때문에 함께 포기 했다 합니다.

그때만 해도 체면으로 살면서 실속이 없었던 어른들 시대 한참

클 나이에 배고픔도 참아야 했고 어른들 말이 법이 되어 옳은 말 하면

바른말 한다고 흉보던 시절 인천 애들이 시골애들 서울에 와서 공부 

한다고 때리면서 빵을 사달래서 늘 배고팠는데 한번은 아는 선배가 그럼 

체육관 다니면서 운동 배우라 해서 권투를 잘하였는데 국가대표로

시험을 보려면 외국을 가야 한다니 그때만 해도 비행기표를 개인이 사야

한대서 돈이 없어 그냥 권투를 포기했는데 학생들은 속없이 권투

잘하니까 다 붙어 다녀 똘만 이들이 많았고 이래저래 속상한데 인천

학생들이 껍죽거리니 화가 나서 다리를 걷어찼는데 한 학생이 다리가

부서졌지만 그때만 해도 큰 사고 없이 지나쳐 버렸답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이고 인권을 중요시 하지 않는 후진국 고등학교

졸업 못 하고 조카는 속이 상해 집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때

고모부가 어느 회사에 간부로 있어 그곳에 취직해서 돈 벌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고모부가 병이 생겨서 회사를 그만두어 아버지를

돕게 되었다니 참 가난과 싸우며 마음대로 공부도 못하고 취직은 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참 어려운 시대 기구한 이야기였습니다.

70이 넘어 지금은 애들이 주는 생활비로 살지만 내가 온전하지

않아 주방장이 되어 나의 손 발이 되었으니 그때 아버지 동네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모른 척했더라면 남편 인생은 군인연금으로 땅땅거리며 

아이들에게 큰소리치는 아빠가 되었을 텐데 한 생을 살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성격이라 편하다 하여 내 친구들과 만나 옛날이야기도

하고 운동해서 나이보다 청년에 가까운 건강한 모습이랍니다.

남편이 우연히 인천 사는 고등학교 동창생을 아는 교수를 통해서 알게되어 

인천에 있기에 만나러 갔다가 5년 전인가 그때도 인천에 사는데

남편이 이름을 대니 반갑다고 찾아왔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으며 

빼싹 말라서 한쪽 다리를 절고 있길래 물어보니 옛날 고등학생때 다친

다리 라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고등학교 때 남편이 걷어찬 다리

였다고 해서 미안하다 하니 괜찮다며 웃기는 했지만 마음이 걸리었고 

그러고 보니 마음은 청춘인데 하나둘 모습이 늙어가며 세상과 이별한 

동창들이 많아지고 있다니 지금 그 동창도 살아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은 인생 탈 없이 잘살기를 바랜다며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는 들었는데

조카딸과 여동생이 오니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나 그 시절의 이야기 

재미있어 듣다 보니 남편의 이야기가 옛날의 좌화상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라며 말도 안 되는 짓을 외할아버지가 했다고

아니 삼촌할아버지는 일반학생이라 돈이 들어 가지만 국비생인

외삼촌을 왜 희생시키었냐고 조카딸이 집에 다가도록 외할아버지

밉다고 했다니 통행 금지가 있고 부족한 속에도 머리만 좋으면

배울 수 있기에 70이 넘은 사람들 이야기 그들이 씨앗을 뿌린건데 

거두지 못하고 하나둘 안보이니 60년대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나

대학은 아무나 못 갈 때지만 지금은 온라인 시대에서 그 시절의

추억이 되었답니다.

일그러진 영웅이 그 시대의 우리들 이야기 같아서 더 공감이 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폰 유튜부로 일거러진 영웅을 들으면서 잠들었나?

주말에 아이들과  하룻밤이 생생하게 재현 되었고

어느시대나 부모들과 아이들의 사랑은 다르지만 똑같았다

시골로 전학온 아들에게 아버지의 충고는 따돌림

안 당하게 살라하며 어릴때도 싹수가 보이기에

옳은소릴 하면 싫어하고 어른되면 좌천되니 내 자식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부모 마음 부모가 되어서 이해하였다.

됨됨이가 먼저인데 경쟁의 세상에서 공부를

우선으로 하기에 삐뚤린 아이들을 부모가 만들고 있으며.

아들이나 딸이나 대우가 같은 지금 공부보다는 게임이

더 좋으니 몰래 하고 안 한척 부모들을 속이는데 어른들이 가르친 것.

할머니와 노는 것보다 게임이 더 좋을거라 생각이 들어도

폰보다 할머니가 더 좋지 하면 예하고 큰소리로 대답한다.

옆구리 찌르고 절맏는 식이라도 속아주며

믿어주는 척하니 아이들에서 어른들도 속임을 배웠다.

손주가 아들보러 아빠라 하며 내리사랑이라 아이들에게

더 사랑이 가며 효심과 자식 사랑은 우리의 경험이었다.

그러기에 부모눈보다 자식눈이 더 무섭다고 하며 괄시 안

받으려면 관심도 사랑으로 보여야 했다.

할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핑계지 도착하면 밤 늦도록 컴게임을

하다가 마우스도 안끄고 지쳐서 잠든다.

하룻밤 자고가니 마음만 바쁘지 꿀잠을 자는 애들 깨우기가

그렇고 먹는 것 보다 잠이 더 좋은것을 그래도 모처럼

온거라 깨우는 것이 고역이며 늦게자고 일어나니 잠도

제대로 깨지 않고 아침 먹을 시간은 적어도 할아버지 집이었다.

우리시대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은 흘렀어도 시대따라 만남이

좀 달라도 보모자식 사랑은 하나기에  일그러진 영웅은 지금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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