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하느님 사랑/주님의 말씀.나의 생각.

열왕기.

우리들 이야기 2024. 11. 10. 06:05

 

 

 

 

아합 왕과 이제벨의 악행

허영업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중국 역사에서 고황후 측천무후 . 서태후는 3대 악녀로 불린다.

이들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의 권력을 휘두르고

무고한 신하들을 포함해 많은 수의 대신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으며 나라를 크게 흔들었다.

조선시대에 악명을 떨쳐서 유명했던 악녀 중에는 오늘날까지 

드라마와 연극 등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녹수와 정난정. 장희빈등이 유명하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조선 왕이나 왕실을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다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수렴청정이나 국정농단의 결과는 뻔하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악명 높은 여자는 누구일까.?

아합 왕의 부인 이제벨이 아닐까?

이제벨을 시돈의 왕 엣바엘의 딸이었는데 아합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결혼은 이스라엘에 엄청난 비극을 몰고 왔다.

아합도 어느새 바알을 숭배하고 이스라엘에는 이방 종교가 침투하게 된다.

이제벨의 유혹에 넘어간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과 단을 건축했고 아세라 여신상도 세웠다.

 

 

이제벨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말살하기 위해

왕과 백성들을 꾀어 바알 숭배자들로 만들었다.

끝내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이제벨의 아버지. 엣바엘은 본래 아세라 신당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이었다.

그가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역모를 통해 왕좌를 찬탈했다.

그는 하느님을 믿는 이스라엘의 종교까지 정복하기 위해 딸을 이용했다.

이제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자칭 선지자로서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전하는 전형적인 사기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과 함께한다는 뜻이 있다.

복잡한 종교 환경과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겨루어 이기고

하느님이 진정한 하느님이심을 증명한다.

이제벨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며. 엘리야마저 살해하려 했다.

결국 이제벨의 음모대로 나봇은 살해당했고 그의 포도원은 빼앗겼다.

 

 

이제벨은 이런 악행으로 결국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된다.

다행히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 이제벨은 아랫사람들에 의해

2층에서 땅으로 내던져지고 그 시신은 개들에게 먹히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요람 왕을 죽이고.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켰다.

 

 

쿠데타는 가장 측근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일반적인 공식이 증명된 셈이다.

예후는 바알 신앙 척결을 철저하게 이행하여

하느님으로부터 4대까지 왕조가 존치되는 것을 약속받기까지 한다.

이제벨은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단어로 쓰였으며 악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시대의 인물[7]-①은 분열왕국의 초기 인물들과 남⸱북 이스라엘의 정치,종교적 상황에 관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왕국은 초대왕 르하브암(933-916)➜아비얌(915-913)➜아사(912-871)까지이며 성경부분은[1열왕 12-16,28; 2역대 10―16장]입니다. 
◉북이스라엘왕국은 초대왕 예로보암1세(933-911)➜나답(911-910)➜바아사(910-887)➜엘라(887-886)➜지므리(7일) ➜오므리(886-875)까지이며 성경부분은 [1열왕 12-16,28]입니다. [7]-①내용은 예언자 엘리야 출현 전까지입니다. 남⸱북왕조시대의 인물은 [7]-⑦유배시대까지 이어지며 임금의 연대는 자료마다 ±1~2년의 오차가 있습니다.

열왕기의 저자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중시키며, 우상숭배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산당들의 폐쇄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따라서 열왕기저자의 평가도 왕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하고 합법적인 제의 장소로 인정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선한 왕과 악한 왕으로 구분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역대기가 다윗왕조만을 다루는 반면, 남⸳북왕조를 함께 다루며 계약의 순명이라는 기준에 따라 남북왕조 모두 엄격하게 비판합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왕을 말할 때에는 유다 왕의 통치시기를 언급하면서 하고, 유다왕의 통치를 언급할 때는 이스라엘 왕의 년대를 언급하면서 남북왕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의 명부에는 한 사람의 왕도 누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다윗의 마지막 시기와 그의 왕위 계승의 최종 역사인 솔로몬등극부터 바빌론 유배(기원전587)까지 약 400년간에 걸쳐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다윗의 통일이스라엘 왕국기는 1.2사무엘기에 기록되어있고, 1.2열왕기는 남북이스라엘의 시작과 멸망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70인역은 이 네권의 책을 묶어 I.Ⅱ.Ⅲ.Ⅳ왕국기라고 합니다(상세내용은 7.왕정시대 3-①참조).  

1.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솔로몬은 다윗의 업적을 잘 활용할 수 있었던 영민했던 인물이었으나 결국에는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임금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다윗 사후 즉시 반대파를 제거했고 왕국은 솔로몬의 손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습니다(1열왕 2,46). 그러나 이 황금시대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야기(惹起)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사무엘이 예견한대로 이스라엘이 감수해야했던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파제를 약화시키고 왕권을 확립했으며 가나안족 노예 외에, 자금부족으로 자국의 백성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는데 이것이 민노(民怒)의 원인이 됩니다. 솔로몬이 죽기 전 북부지파와 다윗 가문은 완전히 사이가 나빠져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건축사업은 농경민들을 끌어내어 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그에 따라 도시문화는 발전하고 富에 의한 계급이 형성되어 분열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다윗 왕정의 출발부터 안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내적인 분열을 가져온 몇 가지 요인들을 정리해보면  ❶다윗 왕정을 확실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보는 부류와 ❷다윗 가문에 충성하지만 옛 전통을 계약에 의거해야 한다는 부류, ❸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입각해야 한다는 왕조 계승을 거부하는 북부의 부류 등 이었습니다. 후에 마카베오의 출현으로 유다는 그리스의 지배에서 독립을 하게 되지만, 이 혁명으로 다시 하스모니아 왕조가 탄생하여 세습왕조에 불만을 품은 많은 경건자들이 광야로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여러모로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부족의 자주성과 중앙 집권과의 간격을 메우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다윗왕국은 솔로몬死후 붕괴했고 남⸳북으로 갈라진 두 나라는 서로 전쟁과 공존을 계속하다가, 먼저 북 왕국이 그리고 남 왕국 유다도 멸망하게 됩니다. 유다왕국의 멸망과 함께 다윗 왕조는 사라졌으나,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올 이상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뿌리를 내려 이스라엘 신앙과 역사를 형성한 중요한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2.열왕기시대의 국제 정세
왕국 분열에서 유다 왕국 멸망까지가 1열왕 12장 이하부터 2열왕 2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열왕기의 배경이 되는 당대의 국제정세를 보면 다윗 시대에 이집트, 아시리아 등 주변 국가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이스라엘은 통일과 함께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①이집트 : 솔로몬시대에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동맹관계를 유지해야할 만큼 세력도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 5년에 이집트는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해 갔으며(1열왕 14,25이하), 솔로몬 때의 반란주모자 예로보암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1열왕11,40). 
②시리아 :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일부 기간 동안 시리아(아람)는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으나,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북이스라엘 갈릴래아 지방을 초토화하기도 했습니다(878년경. 1열왕 15,20).
③아시리아 : BC721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패망하였고 남유다도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시리아는 점차 세력이 약해지고 바빌론에게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④바빌론 : 바빌론은 BC609년에 아시리아를 제압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605년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의 느코에게 승리합니다. BC587년 마침내 유다는 바빌론제국에게 멸망합니다. 

3. 분열 왕국의 형편
이제 남⸳북 이스라엘은 내정 문제로 제국을 지탱할 힘이 없게 되었고 두 나라는 이류 국가로 전락하였습니다. 조공 받는 것이 불가해졌고 무역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경제적인 파탄이 왔습니다.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차지한 르하브암은 북부이스라엘의 복귀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마야의 신탁으로“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올라가 그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렇게 된 것은 나의 뜻이다.”(1열왕 12,21-24; 2역대11,1-4);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원문대로 하면 ‘그들을 가게 내버려 두어라’ 사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친솔로몬과 손자 아사의 개혁정치를 볼 때 아쉬운 면이 많이 보이는 유다왕국의 초대임금이었습니다. 국경을 낀 남북전쟁이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가운데 남부 유다왕국은 영토는 작았지만 확고한 다윗왕조전통과 종교 제의의 전통이 안정되어 있었고 동질의 족속이었으므로 내란은 없었으나, 예로보암이 초대왕으로 등극한 북이스라엘왕국은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1) 유다 왕국

①르하브암 Rehoboam(Ῥοβοὰμ) in Judah: 기원전 933-916
솔로몬이 죽은 후 북쪽 지파들이 반기를 들면서 남북이 정치/종교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1열왕 12). 르하브암은 예루살렘에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고 북부 대표들로부터 왕 승인을 받기 위해 스켐으로 갔으나 분노하는 백성들을 피해 도망해야했습니다. 스켐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티나에 정착하던 초기부터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으며 이 시대에까지 종교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여호 24장 스켐집회 참조). 그는 오만한 태도로 북부 지도자를 대하였습니다. 북부는 르하브암의 왕위 인정 대가로 선왕 솔로몬이 실시했던 강제노역의 감면을 요구했는데, 정치적인 통찰력도 없고 시대의 요구와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무감각했던 르하브암은 원로들의 조언을 일축하고 젊은 층의 강경책 조언을 따랐습니다. 이 젊은층들은 아마도 솔로몬의 많은 후궁들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들이거나 아니면 궁에서 어울리는 귀족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르하브암의 우둔함과 오만이 내장된 분열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북부는 탈퇴를 선언하고 예로보암을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임금이 자기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은 것을 보고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이 무엇이냐? 이사이의 아들에게서 받을 상속 재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네 천막으로 돌아가거라. 다윗아,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은 자기 천막으로 돌아갔다.’(1열왕 12,16)
르하브암은 다윗왕국의 한 부분을 물려받아 유다와 벤야민 지파만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북쪽 부족들은 남쪽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유다도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 역시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기념 기둥과 아세라 목상들을 세웠다.또한 그 땅에는 신전 남창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그대로 따라 하였다.르하브암 임금 제오년에 이집트 임금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주님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14,22-26)
이상이 르하브암 통치시 유다의 종교 및 정치적 배경입니다. 계절의 주기에 바탕을 둔 가나안 종교는 풍산 예식을 포함하는데, 이 예식에서 성행위는 중요한 상징적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풍산 신의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곳에 예배하러 오는 남자와 여자들을 맞아 성행위를 하는 ‘신전 창녀와 남창들’(신명 23,18)이 있었습니다(15,12; 22,47; 2열왕 23,7 참조). 이‘종교적 매춘’은 이스라엘 신앙의 온전성과 순수성을 끊임없이 해치는 위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옛 왕국이 갈라진 뒤, 이집트는 르하브암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그를 공격합니다. 또한 이집트는 북 왕국 임금 예로보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이집트 시삭의 침략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②아비얌 Abijam(Αβιοὺ) in Judah: 915-913
르하브암과 암몬족 어머니의 소생 아비얌이 즉위하였습니다(1열왕 15,1-8). 그의 모친 마아카는 아세라의 숭배자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신전 여사제와의 매음이 성했고 남창들이 성행하여 이교의식이 만연하였습니다. 아비얌은 3년 정도 통치하는데 성경은 아비얌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고, 아비얌의 아들 아사가 즉위하였는데 미성년기에는 마아카가 섭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③아사 Asa(Ασὰ) in Judah: 912-871
아사가 아람왕 벤 하닷에게 보물을 보내며 북이스라엘과의 동맹을 파기 할 것을 요청합니다.  
‘“나와 임금님 사이에, 나의 아버지와 임금님의 아버지 사이에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나는 임금님에게 은과 금을 예물로 보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임금 바아사와 맺으신 계약을 파기하시어, 그가 나에게서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벤 하닷은 아사 임금의 말을 듣고, 군대의 장수들을 그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게 하였다.’(1열왕15,19-20)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은 서로가 경쟁적으로 다마스쿠스의 아람 제후들이나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임금들과 동맹을 맺어 다른 편을 제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한심한 동맹 놀이를 끊임없이 전개시키면서 두 왕국은 점점 함께 약해져 갔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몰지각한 정책에 늘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이 동맹을 맺어 이웃 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성년이 된 아사는 일단의 개혁을 단행하여 그 땅에서 이교신과 그 의식을 모두 제거하였고, 그의 할머니 마아카(마아카는 아비얌의 어머니이다. 우리말성경 15,10-13은 할머니로 번역되었는데 히브리 말 본문에는 “어머니”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아사의 어머니와 그의 아버지 아비얌의 어머니는 똑같은 사람이 된다. 모후의 이름과 선조에 관한 전승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칠십인역에는 마아카 대신 아나로 되어 있다.아사가 아비얌의 동기(同期)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를 가나안의 신 아세라의 상을 경배한 이유로 모후에서 폐위하였습니다(1열왕 15,11-15;2역대15장;아사의 개혁). 이교도의 예배와 의식은 어디서나 행해졌고 심지어는 궁 안에서도 만연했는데 아사는 그것들을 축출함으로써 하느님신앙을 유다에서 정당한 위치로 회복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파기하고 시리아(아람)왕 벤 하닷과 동맹을 맺습니다. 
2역대 15,19에는 “그 뒤에 아사 통치 제삼십오년까지 전쟁이 없었다.”고 하는데 1열왕 15,16에는 “아사와 이스라엘 임금 바아사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전쟁이 있었다.”로 되어 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열왕기와는 달리 전쟁이 없었다고 기록하는데 역대기 저자는 에티오피아 사람 제라의 침략을 빼고 아사의 통치 기간을 전체적으로 평화의 시대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아사가 벤 하닷에게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벤 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몇몇 도시를 빼앗은 일을 책망하는 예언자 하나니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이 아사를 매우 화나하게 하여 아사는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다른 백성도 괴롭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2역대 16,10).
말년에 아사는 병에 걸렸는데, 역대기 저자는 이것을 하느님의 징벌로 봅니다(그가 하느님이 아니라 아람왕에게 의존한 것과, 병중에 하느님을 찾지 않고 의사를 찾았기 때문). 아사는 자신을 위하여 다윗성에 깎아 놓은 무덤에 안장 됩니다. 아사의 아들 여호사팟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습니다.

2) 북이스라엘 왕국 
[예로보암왕조;예로보암1세 933-911➜나답 911-910]
[바아사왕조; 바아사 910-887➜엘라 887-886]➜[엘라의 장교 지므리 7일간]➜
[오므리왕조;오므리 886-875]

①초대왕 예로보암1세 (Jeroboam ; Ἱεροβοὰμ): 기원전 933-911
❶솔로몬 통치 말년 과중한 세금과 강제노동에 저항하여 강제노역 총책임자 예로보암이 왕에게 반기를 들었고(1열왕 11,26), 솔로몬은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집트로 망명하여 파라오의 보호를 받았습니다(1열왕 11,40). 에프라임 지파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은 예언자 아히야에게서 하느님께 순종하면 번영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1열왕 11, 30-31)’” 그 약속을 믿지도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들어 북이스라엘이 존립하는 동안 내내 쓴 열매를 먹도록 한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을 다윗 왕국과 분리시켜 신생국가를 건립하였고 22년을 지배한 능력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2부족의 제 1세력 에프라임가문의 예로보암1세는 솔로몬에 반기를 든 인물이니 왕이 되어야했을 것입니다.  
❷종교 분단(1열왕 12,20-32)
⑴수도 - 북 왕국은 지리적으로 외세의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족 동맹 전통을 유지하였고 넓은 대지를 소유하였습니다. 새 왕국은 전무한 행정기구에 군사조직과 공식 제의 등도 없었습니다. 예로보암은 수도를 스켐으로 정합니다. 므나쎄 지파에 속한 땅 스켐은 잠시나마 북 왕국의 첫 번째 수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켐보다는 티르차와, 나중에는 사마리아가 북 왕국의 수도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사마리아는 오므리왕 때 수도가 됩니다. 이처럼 수도가 여러 곳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북 왕국 왕조들을 특징짓는 불안정성을 반영합니다. 요르단강 건너 야뽁강 가의 거룩한 성읍 프누엘을 요새로 만든 것은 이곳이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⑵공식제의(祭儀) - 예로보암은 예루살렘 제의에 대응할 만한 공식적 국가 제의(祭儀)를 스스로 제정하였습니다(1열왕 12,26-33). 그는 ⒜산당을 세우고, ⒝예루살렘 밖에서 축제를 지냈으며,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들에게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종교적인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그와 같은 조치를 취했고 유다에서 거행되는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연례 축제를 제정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되고 다윗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이것을 제지한 것입니다. 예로보암 생각에도 다윗왕조는 거대했었습니다. 

“임금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인 여덟째 달 열닷샛날이 되면, 베텔에 세운 제단에 올라갔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킬 축제일을 이렇게 정하고, 그 제단에 분향하러 올라갔던 것이다.”(1열왕12,33)
열왕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예로보암이 신명기의 법규들을 얼마나 많이 어겼는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산당을 세우고(신명 12,2), 예루살렘 밖에서 축제를 지냈으며(신명 16,5-6.11),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제직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신명 18,5). 이 밖에도 예로보암은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 사용하고, 사제가 아닌데도 제단에 접근하여 제사를 바치고 분향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로보암이 제단 옆에 서서 분향하려고 하는데, 마침 하느님의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유다에서 베텔로 왔다. 하느님의 사람이 제단에 대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외쳤다. “제단아, 제단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윗의 집안에 한 아들이 태어나리니, 그 이름은 요시야이다. 그가 네 위에서 분향하는 산당의 사제들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치고,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울 것이다.’”  (1열왕 13,1-2)
이 본문은 300여년 후 유다왕 요시야가 행하게 될 종교개혁(2열왕 23,15-18참조)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 성소를 세우는 잘못을 강하게 지적하기 위해 저자가 여기에 삽입한 것으로 봅니다. 요시야는 경신례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키고 다른 모든 성소와 베텔의 성소를 허물어버립니다. 요시아 당시의 베텔은 100년전에 멸망한 북왕국의 지역인데 그 당시 아시리아가 세력이 약화되어 요시아는 옛북왕국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⑶금송아지상(像) -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공식 성소를 설치하고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놓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12,28). 이 금송아지는 탈출 32,4의 금송아지가 의미했던 것처럼 이방인의 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기념 기둥에 보면 폭풍우의 신, 풍산과 파종의 신인 바알이나 하닷이 힘센 황소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송아지나 황소는 풍산과 힘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과 아람과 히타이트에서 신들은 동물들 위에 서거나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동물 자체와 동일시되지는 않았습니다. 탈출 32,4에 나오는 금송아지도 신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커룹들처럼 신의 현존을 위한 발판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로보암은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신’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하느님의 충실한자로 남을 것임을 스스로 시인합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처럼 주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문제는 예로보암의 의도와는 달리 백성들은 베텔과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를 보고 하느님신앙과 가나안의 풍산 신 숭배를 혼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북왕국의 예언자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스스로, 혹은 예로보암의 축출로 예루살렘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아히야 예언자의 신탁은 예로보암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범죄는 그의 가문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고합니다(1열왕 14,1-20; 15,25-32).

②나답 Nadab(Ναδὰβ) in Israel:  911-910
“유다 임금 아사 제이년에 예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두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사카르 집안 출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거슬러 모반하였다.”(1열왕 15,25-27)

③바아사 Baasha(Βαασὰ) in Israel: 910-887
“바아사는 유다 임금 아사 제삼년에 이렇게 나답을 죽이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1열왕 15,28) 
이스라엘 왕국에는 서로 다른 왕조가 여럿 들어서서 그 수가 아홉에까지 이르렀고 아홉 왕조 가운데 네 왕조는 한 임금만으로 끝났습니다. 이에 반하여 유다 임금들은 모두 다윗 왕조에 속하였습니다.
“바아사는 임금이 되자마자 예로보암 집안 전체를 쳤는데, 예로보암에게 속한 모든 목숨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유다 임금 아사와 이스라엘 임금 바아사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전쟁이 있었다.”(1열왕 15,29-32)

④엘라 Elah(᾿Ηλὰ)  in Israel: 887-886
“유다 임금 아사 제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티르차에서 두 해 동안 다스렸다.”(1열왕 16,8)

⑤지므리 Zimri (Ζαμβρὶ)  in Israel:  7일 / (886)
‘엘라의 신하 지므리라는 장수가 그를 거슬러 모반하였다. 지므리는 임금이 되어 왕좌에 앉자마자 바아사의 온 집안을 쳐서, 그에게 딸린 사람 가운데 일가든 친구든 사내는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유다 임금 아사 제이십칠년에 지므리가 임금이 되어, 티르차에서 이레 동안 다스렸다.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지므리가 모반하여 임금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날로 진지에서 군대의 장수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내세웠다’(1열왕 16,9-16).

⑥오므리 Omri (᾿Αμβρὶ) in Israel: 886-875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둘로 나뉘었다. 백성의 절반은 기낫의 아들 티브니를 임금으로 세워 그를 따랐고, 다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다.”(1열왕 16,21)
오므리가 임금이 될 때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던지 이 대목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사료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오므리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아서 그의 통치에 관하여 길게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임금은 신명기계 저자의 평가로는 결코 위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번영기를 이끈 짧지만 강력하였던 오므리 왕조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16,24)
전에는 황무지였던 언덕에 사마리아를 매우 굳건하게 세우고 그곳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수도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므리가 강력한 임금이었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사마리아의 정리 작업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16,32) 예로보암 2세가(2열왕 14,23) 계속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읍의 화려함이 예언자들의 눈을 현혹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 예언자들은 사마리아의 교만과 우상 숭배를 배척하였습니다(이사 28,1; 호세 8,5; 아모 4,1; 미카 1,5). 사마리아는 이웃 나라 성읍 다마스쿠스와 경쟁하여 다투다가(2열왕 6─7) 긴 포위 끝에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인들에게 함락됩니다(2열왕 17,5-6). 아시리아인들은 사마리아를 그 지방의 중심 도시로 정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인들의 지배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에즈 4,10; 느헤 3,34 참조). 사마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고 특히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찬란한 부흥기를 맞았으나 지금은 폐허와 세바스티예라는 작은 마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므리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사마리아에 묻히고, 그의 아들 아합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16,28)

3)북왕국의 내란을 종식한 오므리 
북 왕국은 폭력에 의해 자주 왕위가 바뀌었습니다. 예로보암 사후 그의 아들 나답이 즉위하였으나➜부하인 바아사에게 암살되고➜바아사는 예로보암 왕조를 몰살하고 왕위를 차지합니다➜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즉위하였으나➜엘라의 장교 지므리에게 암살됩니다➜지므리가 왕이된지 일주일 후 사령관 오므리가 지므리를 암살하고 즉위합니다➜오므리 즉위 후 왕조는 비교적 안정되었고 국력을 다소 회복하였습니다. 오므리는 열왕기에 간단히 취급된 최악의 왕이었으나 막강하고 유력한 왕이었습니다(1열왕 16,23-28). 이 무렵의 신진세력 아시리아는 북왕국을 오므리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오므리는 다윗 정책을 본받아 국내의 평화를 유지하였으며 유다와 우호관계를 위해 노력하였고, 아들 아합을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제벨과 정혼하여 동맹을 맺었으며, 아합은 자기 누이(혹은 딸)아탈야를 유다왕 여호사팟(870-846)의 아들 여호람과 정혼하여 유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후 남⸱북의 반목은 종식되고 평화로웠으며(2역대 17―20)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소국가들이 동맹을 맺던 시기였습니다. 
오므리는 수도 사마리아 건립을 착수 했고 아합이 사마리아성을 완공합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시대 [7]-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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