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문화/대한의 역사.세계사 이야기

시대

우리들 이야기 2023. 8. 13. 15:10

 

시대
판관 시대를 거쳐 왕정시대에서 대통령시대까지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은 없었으며

특히 사랑은 방법은 달라도 물 흐르듯이 하얀

거품일기도 하면서 흐르고 있었다.

대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대천으로 해도 달도

그대로인데 건물들이 시대를 말해주고

커버린 나무에서 세월이 보였으며 판사들과

변호사 검사들도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고 먼훗날

법조인들의 양심을 드러나면 사실만 남았더라.

 

시대의 정신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정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하는가?

일본의 혐한 식민지 시대를 겪어온 어른들의

한맺힌 설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일 관계가 찰떡궁합이 되었는지?

세상에 영원한 것 없다고 섬나라보다 우리

민족이 위에가 있는데 왜 옛날로

돌아가서 알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성찰하고 되돌아 보아야 할 부분.

원자폭탄으로 망해진 섬나라인데 남북 전쟁

으로 다시 일어난 섬나라 저들은

우리가 은인인데 지금도 멸시하고 있으니?

피해자와 피의자가 갈등하며 싸우고

있으니 섬나라 만행으로 피해자가 되어

한민족 역사속에 저들은 파렴치 하였다.

정권이 바뀌면서 그동안 쌓아온

민주화가 무너지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있으며.

아픈역사 슬픈겨레에서 일어선 대한 독립만세.

독도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화해가 해방이고 독립인데 누가 머슴이고 양반인가?

생각의 차이로 충돌하는데 언제까지일까?

 


슬픈 근대사

195916, 일찍이 대통령 불출마를 표명한 바 있던 이승만은

다시 4선 출마의사를 밝히고, 자유당 조직확대의

일환으로 전국청년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같은 해 122

대한반공청년단을 발족시켰다.

자유당 역시 23일 이승만이 표명한 4선 출마의사를 지지하고

전면적인 선거준비작업에 돌입하였다.

자유당은 지방행정조직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지방자치법>

개정을 통하여 이루어놓은 시··면장의 임명제

도입으로 비자유당계 인사들을 모두 포섭하려 하였다.

또한, 중앙조직위원회에 특수조직책을 두고 정부

각 부처에 과별로 당세포를 조직,조직기관장이 이를 감독하게

하는 등, 창당 이래 유례 없는 대대적 조직망 확대작업을 펼쳤다.

같은 해 321일 선거에 대비한 개각을 단행하였고,

513일에 실시된 7개도 지방장관 경질에서도 자유당은 자당

인사를 대거 진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같은 해 629일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여 재빨리 선거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민주당에서는 대통령후보 결정을 둘러싸고

신구파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져 10월의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 마저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1월에 들어와서야 전당대회를 열 수 있었다.

민주당은 1126일의 전당대회에서 신·구파간의

실력 대결을 통하여 구파의 조병옥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신파의

장면을 부통령후보 겸 당대표 최고위원으로 각각 선임하였다.

군소정당들도 각기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의 대책마련에 부심하여,

통일당은 1118일 김준연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하고

동시에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노농당은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고 대통령후보에

전진한 부통령후보에 이훈구를 각각 지명하였다.

이처럼 야권의 선거전 전열정비가 내부의 사정으로 인하여 늦어지자,

조기선거실시가 상책이라고 판단한 자유당은 11월부터

본격적인 선거대책을 세우고 부정선거를 사전에 준비해 나갔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전국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시키고,

이어서 전국 시···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득표를 위한 활동을 지시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하였다.

,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하여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중앙당으로 하여금 거액의 선거자금을 마련하게 하였다.

자유당 중앙당에서는 선거자금 모금목표를 당시 화폐로

50억환으로 책정 재무부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산업은행을

비롯한 시중 은행과 굵직한 기업체 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여, 거의 70억 환을 모금하였다.

19601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면서 조기선거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315일을 선거일로 공고하였다.

그러나 215일조병옥이 급서함에 따라 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를 염원하던 국민들은 1956년의 신익희야당

대통령후보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실망과 좌절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제 야권의 강력한 대통령 경쟁후보가 없어진 이상,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 되었으며, 따라서 선거의

초점은 대통령직의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선거로 옮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후보인

이기붕 사이에서 전개되는 양상이 되었으나, 자유당은 당초에

짜놓았던 부정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선거전이 본격화하자 정부·여당의 야당선거운동 방해사건이

잇따라 일어났으며 이에 민주당은 4할 사전

투표와 공개투표 등 경찰의 부정선거지령을 폭로하였다.

또한, 같은 해 3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긴급소집된 민주당 확대간부회의는 부정 및 불법사태를

엄단하여 달라는 내용의 이대통령에 드리는 공개장

채택하는 한편, 전국민에게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실상의 선거포기였으며,

3·15선거는 투표도 하기 전에 끝난 셈이었다.

같은 해 315일의 투표는 야당측이 거의 방관한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며, 민주당은 그날 오후 ‘3·15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행위

라고 규정한 뒤 선거무효선언을 하였다.

개표가 시작되자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조작되어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고, 이런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결과 최종집계는 총투표1,000여만 명 중 이승만 960여만

명으로 88.7득표 이기붕 830여만 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공공연한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15일 저녁마산에서의 부정선거규탄 시위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결국은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

되었으며 이 재판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으로 이관되었다.

재판 결과, 3·15부정선거 당시의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는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관련자들도 실형을

받았으나 그 뒤 감형·특사 등으로 거의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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