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시/좋은글ㅡ 명언

오드리헵번

우리들 이야기 2014. 10. 16. 10:44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 말은 전 세계 신문에 헤드라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기부문화를 불러 일으켰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굶주린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정렬을 짧은 시간 동안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다.
 
은막의 스타를 뛰어 넘은 진정한 스타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었다.

1992년 9월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있었다. 소말리아는 그녀가 방문했던

그 어떤 지역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죽은 어린이들은 쇼핑백만한 자루에 담겨 묻혔다. 오드리 헵번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았으며 마음 깊이 함께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쌓은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지만,

구호 현장에서는 절대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인간 오드리 헵번으로서 어린이들을 대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기꺼이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아픈 아이의 눈썹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내쫓았다.

전쟁지역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했으며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 왕년의 스타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구호활동에 감동했고 새로운 기부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녀 이후 많은 명사들이 진심이든 혹은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 들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진짜 스타였다.

 

오드리 헵번의 구호 활동은 의뢰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1988년 오드리 헵번은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조용히 은둔하며 왕년의 스타로서 흠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그것도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드리 헵번은 흥분했다.

 

유니세프 쪽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 측에서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다.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오드리 헵번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녀는 즉시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유명인

친선 대사가 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참가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오드리 헵번은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았기에 소속사도 없었고 까다롭게 스케줄을 조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다. 일 년에 보수가 단지 1달러이며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조차 내주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오드리 헵번은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선기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그녀의 구호 활동은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깊이를 더해갔다.

구호지역에서 어린이와 함께 웃고 있는 오드리 헵번

구호의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그녀는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다.

오드리 헵번의 노력으로 전 세계인들은 구호활동에 대해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명사들뿐 만 아니라, 누군가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구호 운동에 일반인들도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정열적인 유니세프 활동은 구호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나날이 쇠잔해지고 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일정과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은 오드리 헵번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직전부터 오드리 헵번의 건강은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며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될까 봐 노심초사 했다. 그리고 무리해서 방문한 소말리아에서

아랫배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다.
 

스위스 톨로세나에 있는 오드리 헵번의 무덤(photo by Alexandra Spiirk)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도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인터뷰와 행사에 쫓기며 그녀는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일정이 마무리 된 1992년 11월, 오드리 헵번은 로스엔젤레스의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했지만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단지 3달만이 허락되었다. 병원 치료가 무의미해진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고요하게 보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맞은 크리스마스에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유언처럼 읽어 주었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소울 메이트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스위스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 동료와 전세계인들의 애도 속에서 묻혔다.

오드리 헵번 생전의 정열적이고 진심 어린 구호활동은 이후 유니세프와 민간 구호 단체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오드리헵번 가는곳마다 꽃을 피워냈다.

오랜세월을 기억하게 지구별이되어 어둔곳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환하게 비춰주고있다.

 

 

 

 

오드리 헵번은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 대신

속죄하기 위해 평생 봉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없는 건 '민족성' 때문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역사가 고결한 사람을 낳고,

부끄러움을 덮는 역사가 파렴치한을 낳습니다.

오드리햅번,아버지가 나치협력자임을 알고

사죄의 뜻으로 평생 기부와 봉사.암 선고 이후에도 계속됐다

스베틀리나 "아버지가 독재할때

여러분도 나도 침묵했으니 공범이다.이제 그 비판 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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