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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하성용신부.어니스트 헤밍웨이

우리들 이야기 2023. 12. 10. 07:08

 

 

https://youtu.be/9IH_SCA-SLw

 

 

https://youtu.be/uE6KoC4Gn-Y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 7. 21.~1961. 7. 2.)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1923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로 데뷔하여,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 미국문학사를 수놓는 걸작들을 발표했다.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언론인이자 첩보원으로서

스페인과 쿠바, 중국, 독일 등지에서 활약했다.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인과 바다를 마지막으로

1961년 자살로 추정되는 엽총 사고로 사망했다.

직접 체험한 것을 토대로 창작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작 생활을

영위했던 헤밍웨이는 미국 문학의 전설인 동시에

1차 세계대전 후 삶의 좌표를 잃은 소위 길 잃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린다.

 

노인과 바다

나이든 어부 산티아고는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먼 바다에

도착해 마침내 청새치 한 마리를 잡는다.

그러나 청새치가 너무나 거대해

도리어 노인이 탄 돛단배를 끌고 가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이틀 동안 자기 몸으로 그물을 지탱한 채

청새치에게 끌려가던 노인은 도리어 청새치를 형제라고 부른다.

3일째에 남은 힘을 다해 지친 청새치를

작살로 찔러 잡은 노인은 드디어 싸움을 마치고 물고기를

팔 수 있으려니 기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온다.

노인은 몇 차례 싸움 끝에 간신히 상어를

물리치지만, 결국 항구로 돌아온 그의 곁에는 머리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의 잔해뿐이었다.

평소 노인을 잘 따르던 소년 마놀린은 노인이 무사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의 눈물을 흘린다.

잠에서 깬 노인은 소년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서기로 약속하고,

다시 잠들었을 때 젊을 적

아프리카 해변에서 보았던 사자의 꿈을 꾼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전쟁 영웅이자 기자,

사냥꾼 등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20세기 초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허무주의와 환멸, 상처받은 영혼을 묘사했다.

일체의 수식을 배제한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서술하는 글쓰기 방식이 특징이며,

1954년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독보적인 내러티브

기술과 현대 문학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친'

공로로 그에게 상을 안겼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인기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8997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클래런스 에드먼드 헤밍웨이는 의사였으며,

어머니 그레이스 홀 헤밍웨이는 성악가였다.

오크파크는 부유한 백인, 특히 청교도들이 많이 사는 교외

지역으로, 변화가 없고 안락한 마을이었다.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헤밍웨이는 전형적인 부유층

백인 가정에서 남매들과 함께 어울리며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방학이면 아버지를 따라 미시간 주

여기저기로 사냥과 낚시 여행을 다니곤 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헌신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문학과 음악을

비롯해 뜨개질이나 수예 등도 직접 가르쳤는데,

헤밍웨이는 어머니에게 첼로를 배워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나치게 과보호하던 어머니를

부담스러워해서 종종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런 성장 과정은 후일 닉 애덤스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위 '닉 애덤스 단편으로

불리는 여러 단편 소설들에 반영된다.

헤밍웨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문학 작품들을

접하고 습작을 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후일 그가 대작가로 성장한 후 어머니 그레이스는

초등학교 시절에 쓴 글들이

더 낫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17년에 오크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에 기자로 취직했다.

신문사에 입사한 데는 고교 시절부터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고 한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로

미국까지 전시 상태에 돌입했다.

헤밍웨이는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미 육군에 자원입대

했으나 왼쪽 눈의 시력 장애로 입대를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그는 적십자 부대의 구급차

운전병으로 입대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3주 만에 이탈리아 북부 포살타 디 피아베에서 총상을 입고 6개월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그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병원에서 자신을 간호해 준 6세 연상의 간호장교

아그네스 폰 쿠로스키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때의 경험은 후일 무기여 잘 있어라에 반영된다.

19191월에 미국으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전쟁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한동안 보험금으로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의 불화로 집을

떠나고자 1920년 캐나다 토론토로 건너가토론토 스타

지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8세 연상의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하고,

토론토 스타스타 위클리

의 해외 특파원으로 파리에 갔다.

그는 셔우드 앤더슨, 에즈라 파운드,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등 파리에서 머물던 미국인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 수업을 했다.

그런 한편으로 터키 스미르나에 가서 그리스터키

전쟁을 취재하는 등 기자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다.

그러나 점차 소설 집필에 몰두하면서 기자를 그만두었다.

기자 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의 특징적인 문체,

소위 하드보일드 문체라고 불리는 짧고 명료하며 건조한

문체 방식을 확립했는데, 스스로도 "신문사의 기사

작성 매뉴얼은 최고의 글쓰기 규칙이라 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해들리와의 사이에서 큰아들 잭을 얻었다.

1923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 1924년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서를 파리에서 출간했으며,

1925우리들의 시대에서가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1926년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개로

미국 출판사 스크리브너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그해봄의 격류와 첫 장편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연이어 펴냈다.

이후 헤밍웨이의 모든 작품은 스크리 브너에서 출간된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심리적 상처를 받은 신문기자 제이크 반즈를 중심으로,

전쟁 후 허무주의와 환멸에 빠진 당대 젊은이들,

곧 로스트 제너레이션1) 의 정신적 풍조를 헤밍웨이 특유의

문장으로 그린 작품이다.

수사여구가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헤밍웨이식 문장은 당대

여타 소설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헤밍웨이는 글을 쓰고 퇴고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문장을

줄여 나가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빙산에 비유하면서 "보이는 것의

8분의 7은 물밑에 있다."라고 했다.

이 작품은 출간 후 젊은이들의 열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바이블로 여겨졌다.

헤밍웨이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으로,

자신을 비롯한 전후 세대들이 느낀

환멸과 두려움을 소설 속에 옮겨 놓았다.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허무 속에

몸부림치고 실존의 의미를 찾아 헤매며 위험한 선택을 하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는데, 헤밍웨이 역시 허무주의와

반복적인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몇 차례 이혼을 겪고, 종군기자로

사냥꾼으로서 모험을 좇으며 생을 이어 갔다.

 

1927년 스페인 팜플로나 근처 투우장에서 헤밍웨이

19274, 헤밍웨이는 해들리와 이혼하고 한 달 후에 연인 관계였던 파리 보그지 부편집장이었던 폴린 파이퍼와 재혼했다.

폴린은 헤밍웨이보다 4세 연상에 재력가의 딸이었고, 헤밍웨이가

글 쓰는 생활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받쳐 주었다.

이듬해에는 폴린과 함께 파리를 떠나 미국의 휴양 도시인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로 이주했다.

이곳과 스페인, 파리의 집을 오갔지만, 12년간 대부분을

키웨스트에 머물면서 주요 작품들을 구상했다.

또한 폴린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패트릭과 그레고리 핸콕을 두었다.

그런 한편 1928년에는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부동산 투자에 실패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우울증에 빠져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머니에게 책임의 일부가 있다고

비난했으며, 그 자신도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

1929, 대표작 무기여 잘 있어라를 출간하면서 즉시 상업적,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 시기에 집필 외에도 사파리 사냥, 낚시 여행 등을

다니면서 유유자적 지내거나 기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스페인을 오가면서 투우에 심취해 투우에 관한

논픽션 오후의 죽음을 썼고, 아프리카 사파리

사냥을 다녀와서 논픽션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을 썼다.

또한 1937년에는 북아메리카 신문연맹의 통신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직접 취재했으며, 사회소설

유산자와 무산자, 영화 대본 스페인의 땅등을 썼다.

이 무렵 재즈 시대가 끝나면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명성이 사그라졌고, 헤밍웨이는 미국 최고의 작가 자리에 올랐다.

1939, 헤밍웨이는 폴린과 별거

했으며 쿠바의 아바나 지역에 농장을 사서 이주했다.

1940, 스페인 내전을 취재할 당시 만났던 기자 마사겔혼과

세 번째 결혼을 했으며, 같은 해에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출간하면서 다시

한 번 큰 성공을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헤밍웨이는 미 해군에 자원했다.

그는 독일 잠수함 수색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콜리어

지 등 신문과 잡지의 해외 특파원으로 유럽 전쟁을 취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독일의 파리 입성과 후퇴 등도 취재했다.

늘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헤밍웨이는 이때 기자 신분으로

의용대를 조직해 지휘관처럼 하고 다녔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계급 사칭 혐의로 연합군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1945년에는 마사와 이혼하고 이듬해 기자 메리웰시와

네 번째 결혼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쿠바의 농장과 미국

아이다호 주 케첨에 저택을 구입하여 두 곳을 오가며 살았다.

1950년에는 10년 만에 강 건너 숲 속으로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비평가들은 물론, 독자에게도 혹평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이 때문에 우울증을 겪으며 술과 낚시에 빠져들었다.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와 헤밍웨이 1952, 노인과 바다

출간되면서 다시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는데, 이 작품이 게재된 라이프19529월호는

이틀 만에 530만 부가 팔릴 정도였다고 한다. 노인과 바다1953년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헤밍웨이는 이 무렵 작가로서 절정의 명성을 얻고 전설이 되고

있었지만, 그의 심리 상태는 불안정했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과대망상으로 병원에 드나들었고,

전기충격 요법까지 받았으며, 글조차 쓸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아프리카로 사파리 사냥을 떠나기도 했는데,

이때 비행기 사고를 당해 건강까지 악화되었다.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그는 1961

72일 장총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

사후 유작 움직이는 축제일, 해류 속의 섬들, 닉 애덤스 이야기, 88편의 시, 에덴 동산, 헤밍웨이 단편선집및 허구적 자서전 여명의 진실등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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