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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우리들 이야기 2007. 4. 20. 15:07

 

 

책소개
지난 2006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KOCCA)의 문화원형 글로벌 과제로 <앙코르 와트의 디지털콘텐츠>화(化)가 진행되었다. 이 책은 이 프로젝트의 부산물인 3만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앙코르 문명 전문가인 서규석 박사의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있게 만든 앙코르 문명 교양서이다. 앙코르 여행서가 풍기는 감상과 전공자만이 알 수 있는 앙코르 문명의 전문성을 적절히 조화시켜 힌두 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여러 사원에 새겨진 비문을 소개하고, 유적복원가의 평가와 여행기록을 토대로 역사적인 설명을 가볍게 곁들였으며, 앙코르 유적 전체를 소개하기보다는 앙코르 문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의 사원군, 반테이 스레이를 집중 조명하였다. 여행자가 일반적으로 방문하는 프놈쿨렌, 프레룹, 프놈바켕, 닉폰, 벵 메알레아 등은 보조적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 소개된 유적들은 힌두 문명의 예술과 시대정신이 잘 드러난 걸작들이기 때문에 앙코르 문명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산스크리트 어, 문학, 힌두 문명의 건축과 조각, 그리고 시대상이 고스란히 투영된 앙코르의 여러 걸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앙코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서양이 암흑기에 잠들어 있던 10∼13세기에 동남아시아를 휘저으며 대제국을 건설한 앙코르 문명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보는 즐거움은 어느 문명여행에 뒤지지 않는다.
 
저자 및 역자 소개
글 : 서규석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연세대학교, 청주대학교, 배재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인간과 사회>, <힌두 문명> 등을 강의하였으며, 현재 한국자치경영개발원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와 번역서로는 《이집트 사자의 서》,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 《고다이버 1, 2》 등이 있다.

사진 : (주)시지웨이브
[사진 촬영 : 윤동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진행한 <경복궁 디지털복원> 사진촬영을 하였고,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디지털복원> 사진을 담당하였다. 현재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사진 기획 : 김하동]
조선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주)엘렉스컴퓨터를 거쳐, (주)엘렉스정보네트웍 대표이사, (주)한국소프트중심 부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주)시지웨이브 대표이사이며,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KOCCA) CT기술 심사위원, 경북전문대학 디지털영상콘텐츠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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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1. 앙코르 문명의 탄생
앙코르 문명의 천재성
앙코르 이전의 국가들
앙코르 왕조의 왕들

2. 수리야바르만 2세와 앙코르 와트
크메르의 민족혼, 앙코르 와트
지상의 메루 산, 앙코르 와트
벵 메알레아

3. 자야바르만 7세와 앙코르 톰
왕도의 재건
앙코르 톰과 나가 난간
또 다른 건축의 정점, 앙코르 톰

4. 크메르 건축의 보석, 반테이 스레이
바라문 사제가 건축한 사원
크리슈나와 캄사 왕의 이야기

5. 앙코르 문명의 종말과 재발견
크메르 족의 쇠퇴와 타이 족의 성장
16세기 앙코르 와트의 부활
고대 문명을 살려낸 앙리 무오
프랑스 극동학원의 잃어버린 시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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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세계 최초로 디지털복원된 앙코르 문명, 책과 만나다

지난해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KOCCA)의 문화원형 글로벌 과제인 <앙코르 와트의 디지털콘텐츠>화(化)가 디지털복원 전문회사인 (주)시지웨이브와 동국대학교 전자불전ㆍ문화재콘텐츠연구소에 의해 3D(3차원 디지털)로 복원됐다. 세계 최초로 한국의 기술진에 의해 1여 년에 걸쳐 완성된 '디지털 앙코르 와트'는 동남아시아 크메르 문명의 원형을 복원하여 관광지로만 알려져 있는 앙코르 와트를 문화적으로 세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책과 디지털콘텐츠의 만남이다. 디지털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콘텐츠산업과 아날로그콘텐츠산업인 출판의 결합은 문화콘텐츠산업의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 콘텐츠산업 전반에 창작자료 제공과 폭넓은 활용으로 문화콘텐츠산업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앙코르 문명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힌두 문명이라는 낯설음과 복잡함으로 인해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여행의 자유화로 인해 앙코르 문명의 장엄함과 예술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이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앙코르 문명을 소개한 국내외의 책들과 여행안내서도 앞다투어 출간되어 일반인들이 앙코르 문명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소개된 유적들은 힌두 문명의 예술과 시대정신이 잘 드러난 걸작들이기 때문에 앙코르 문명을 이해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산스크리트 어, 문학, 힌두 문명의 건축과 조각, 그리고 시대상이 고스란히 투영된 앙코르의 여러 걸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앙코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서양이 암흑기에 잠들어 있던 10∼13세기에 동남아시아를 휘저으며 대제국을 건설한 앙코르 문명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보는 즐거움은 어느 문명여행에 뒤지지 않는다.

앙코르 문명의 역사

약 150여 년 전, 앙코르 와트를 세계에 소개한 프랑스의 생물학자 앙리 무오는 자신에게 샤토브리앙의 글솜씨와 클로드 로랭의 그림솜씨가 없음을 한탄했다. 그만큼 앙코르 와트에는 어떤 글이나 그림으로도 쉽게 담아낼 수 없는 신비감이 있다.

앙코르 문명은 2세기 부남 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최초의 힌두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부남국은 연방체제로 6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오늘날의 크메르 인이 캄부자 왕국인 진랍을 건국하였다. 11세기 말에 등장한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진랍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크메르 인의 자부심인 앙코르 와트가 만들어졌다. 그가 사망하자 캄부자 왕국은 1177년 참파 인에 의해 왕도가 점령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라는 영웅에 의해 위기가 극복되며 캄부자 왕국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위대한 사원 건립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도성을 요새화한 앙코르 톰을 비롯한 많은 사원을 건설하고 20년간 참파를 병합하였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크메르 인의 영광은 타이 인이 잠식하기 시작했다. 14세기 전반, 타이 인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며 수코타이, 아유타야 왕국을 세우고 앙코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크메르 인은 힌두 문화의 정수를 타이 인에게 전수하는 조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웃의 힌두 국가인 참파 역시 북쪽의 월남인의 남하로 15세기 말에 종말을 고했다. 크메르 왕국과 참파 왕국의 몰락으로 힌두 문명은 동남아시아에서 퇴장하였고, 1500여 년에 걸쳐 이룩된 힌두 문명의 걸작, 앙코르 문명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크메르 왕국이 멸망한 후 캄보디아는 전쟁과 혁명, 강대국의 식민지, 내전 등 고된 역사의 통로를 걸어왔다. 이런 험난한 역사를 품은 캄보디아 국기와 화폐에 오롯이 새겨진 것이 바로 앙코르와트다. 캄보디안 인들에게 앙코르는 과거의 역사가 아닌 미래의 희망이다.

앙코르 문명의 천재성

우리는 흔히 힌두 문명이라고 하면 발상지인 인도에만 국한시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동남아시아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역사가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등장한 국가는 대부분 인도문명을 바탕으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오히려 인도보다 더 인도적인 문명을 꽃피웠다. 프랑스에서 산스크리트 문학을 가르쳤던 실뱅 레비(Sylvain Levi, 1863∼1935년)는 인도의 문화 전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혜의 어머니, 인도는 자신의 신화를 인근 국가에게 전하고 전 세계에 가르쳐왔다. 법과 철학의 어머니, 인도는 아시아의 3/4에 하나의 신, 하나의 종교, 하나의 이념, 하나의 예술을 주었다. 인도는 신성한 언어, 문학, 여러 제도를 알 수 없는 세계의 극한까지 전파했다.

그의 말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힌두 문명은 다른 토양에서 더욱 빛을 발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캄부자데샤와 자바 섬, 즉 오늘날의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다. 특히 힌두 문명은 캄보디아의 토착민인 크메르 인에게 종교와 경전, 성직자, 세계관, 하나의 문자체계 등 세련된 생활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힌두 문명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앙코르 문명이다.

앙코르 문명은 802년부터 1431년까지 앙코르 왕도에서 힌두 문화를 바탕으로 피어났다. 힌두 신화가 발상지인 인도를 벗어나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캄보디아에 발을 딛고 뿌리를 내리면서 토착민인 크메르 인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창조적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앙코르 문명은 사원건축물과 조각장식, 즉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 바, 프레아 칸, 닉펜, 그리고 반테이 스레이 등 앙코르 지역에 우뚝 솟아있는 유적이 전부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지혜와 사상, 그리고 첨단기술이 모두 담겨 있다.

크메르 인은 600여 년 동안 약 300제곱킬로미터 지역에 도성, 왕궁, 사원 등을 건축하였고, 앙코르 도성으로부터 반경 50∼100킬로미터 이내에 5대 지방도시를 만들어 제국의 틀을 형성하였다. '독창적인 돌의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앙코르 문명은 이렇듯 오랜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인류의 유산이다.

그렇다면 앙코르 문명이 탄생할 당시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앙코르 왕조는 1000년경 본격적으로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서양의 중세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동양의 문명이 더욱 발전된 상태였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나침판, 화약, 인쇄술 등 3대 발명이 이루어졌고, 200년 뒤에는 주달관(周達觀)이 나침반을 가지고 원나라 사신단의 일행으로 크메르를 방문하였다. 이때 북송 개봉(開封)의 인구는 40만 명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는 30만 명, 무어 인이 이슬람 문명을 바탕으로 세운 스페인의 주요 도시는 40만 명이 밀집할 정도로 발전했다. 이때 앙코르 도성의 인구는 21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에 비해 현재 문화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파리의 당시 인구는 수만 명에 불과했고, 런던은 도시가 세워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앙코르 문명은 당시 세계 4대 문명권의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암흑기에 들어가지만 동양문화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앙코르 문명은 오늘날의 라오스, 태국, 미얀마, 베트남 지역까지 차지한 대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Ⅶ, 1181∼1219년) 때에는 도성인구가 60만 명으로 증가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의 눈으로 보아도 앙코르 문명은 놀라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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