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믿음 온유 사랑>

하느님 사랑/주님의 말씀.나의 생각.

말씀의 기도 1

우리들 이야기 2021. 1. 13. 13:09

 

 

생명

세상이 돌아가는대로 상황에 따라 자기를 위해서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였습니다.

안보이는 세상일은 일단 뒤로 미루면서 보이는 세상일에

젖어있다보니 불의에 빠저서 허우적 대면서도 이익이

보이기에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죽음과 생명 영혼과 형체 유한과 무한 세상에서

살기에 유한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실패는 일시적.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의 세상 그곳은 생명이

죽지 않기에 세상에서 마음이 가는대로 몸이 반응하니

그 과정은 하느님과의 관계였나봅니다.

살면서 하느님 때는 매 시간마다 찾아 오니까

잡아야 관계가 성립되지 놓치면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빵이나 먹는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해도

잔치를 할려면 먼저 먹을 것부터 생각하고 정을

나누기도 하니 살기위해 밥을 먹는것은 일상이지만

배고픔이나 맛도 느끼게 하니 마음이 위에가 있는거 같아요.

걱정스러운 일이 생기면 잠을 못이루고

마음이 과정도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도 나하기에 달렸다고 믿음은 관계이며

사랑을 준비하며 살게 하시고 내 안에서 믿음이 생기어

하느님께선 무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 믿게 하소서

저희의 기적은 믿음이며 네믿음이 이루어졌다

하신 주님의 섭리 한번도 당신의 기적을 자랑하지

않으시고 너의 생각대로 이루어졌다

하시고 저희를 부끄럽게 하시면서 배우게 하였으니

주님의 생각 저희도 닮게 하소서.

주님은 우리 가까이도 계시고 멀리도 계시다는 것은 마음.

당신은 보이지 않아도 성령은 주고가시었기에

곳곳에서 백의 천사들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당신을 닮고 성령을 닮아 삶의 과정이 아름답게 하소서.

 

길들어진 관계

살다 보니 세상은 변해가고 옛날이야기는 할머니들이

하는 줄 알았는데 옛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길들어진다는 말을 잘 안 섰는데 길들어진다는 것이

신뢰였고 관계였는데 태어나기 전부터 길들어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길들어진다면 어린 왕자를 떠올리고 관계를 말해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갈 때 우리도 어린 왕자를 만날 것 같아요.

사막 하면 물 한 방울 안 나오는 곳에서 갈증을 느끼며

물을 찾듯이 동화책 속에 어린 왕자는 성탄에 오신 예수님 같아요.

누구든지 어린 왕자를 만나면 그분을 본 것이지요.

삶이 슬픈 것은 아직 어린 왕자를 만나지 못해서고

어린 왕자같이 순수함이 살아있어야 샘물이 솟는 사막이랍니다

누구와의 관계도 다 길들여질 때 믿음이 생기고 신뢰하듯

교만하고 잘난체하는 사람들에서는 길들여질 수가 없었습니다.

길들여질 때는 서로의 시간을 들여서 맺어지는 관계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길들여질 때면 새싹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되니 생각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길들여 지 는 것은 목마른 마음이 물을 찾아가는 것이고

관계가 성립되어 어린 왕자와 장미와의 관계 사막의 여운

길들이지 않았기에 실패했던 것이었으며 길들이는 것이 믿음이라

신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만난 조종사는 재수가 좋은 사람 어린 왕자를 만났으니

어디 가면 그렇게 예수님 닮은 순수한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소중한 것들은 안 보이기에 그리움이 되었다고 하니

눈과 마음이 맑아지어 소중한 것을 담았으면 합니다.

사는 것에 늘 갈증이 나고 목이 말라도 맑은 샘이 많았으면

물을 찾아 사막을 한참 가다 보면 어린 왕자를 만날까요?

꿈에서라도 어린 왕자를 꼭 만나야 한답니다.

순수는 생각이 만든다고 간사하게 보이는 여우가 아니라

여우를 통해서 길들임을 알았기에 사막에서 물을 찾는다는 것은

조종사와 한참의 시간을 보내면서 길들어졌고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수고를 들여도 아깝지 않았으며

새싹을 아름답게 보는 순수함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꽃이 피어있고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물이 숨어있기에 옛날의 내 집 안 보여도

지나온 세월이 가는 대로 더 나은 집에서 살아도 건물이 아니고

가족이 길들어지고 보이지 않는 추억이 많아서 더 아름다웠습니다.

교회의 추억이 많은 곳 새 건물이 유럽식이지만 나의 마음속은

길들어진 옛날 성당과 포장 안 된 마당 사제관 앞에 라일락 꽃

그곳에서 나의 젊음을 찾아 본답니다.

그때의 건물이 새 건물로 단장하였지만 한 예수님의 집이듯

지나고 보면 하찮은 날들이 전부 길들어져 있기에 그리움이

남았으며 동화 속의 어린 왕자는 순수함이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시어 어린 왕자로 둔갑 된 것 같네요.

예수님을 닮고 어린 왕자를 꼭 만나야 겠습니다.

소중한 보석은 숨어있다고 보이지 않기에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보이지 않기에 희망을 말하고 천국을 그린답니다

비유라며 옛날이야기 같아도 거룩하기에

닮고 싶고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합니다.

구세주 그분이 하늘 문을 열고 땅에 내려오실 때

춥고 구차한 마구간 어린아이로 오시었는데

그분이 어린 왕자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보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시었고

어린왕자는 소중한 것은 감춰져 있다고 한것처럼

하느님의  외아들 독생자 사람으로 오시었는데

어린왕자로 오시기도 할것이니 저희 속이지 마세요. 

예수님 삶을 닮고 싶다고는 하지만 나는 틀렸고

어린왕자라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었으면 합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을 생각하며 인류를 위해 죽지 못하지만 다른 이가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며 남의 신앙에서 자랑할 것입니다.

거룩한 말씀인 줄 알면서도 현실에 어려운 일이고 그대로

따라가면 낙오자가 되고 예수쟁이라는 말을 들으니 부담스럽고

보이는 것들이 유혹하니 빠지어 주님의 길을 지우기도 하나 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으니 천주교 신자로 길들어지어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신앙인이 되고 싶어요,

이런 험악한 세상에 동화지만 성탄에 오시는 어린 왕자

그 이름을 구세주라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라 부를래요.

그때의 초라했던 마구간은 눈부시게 신의 강림 재현하며 오시는

예수 어린 왕자를 보고 낮은 처세로 모든 이가 닮았으면 합니다.

강보에 싸인 연약한 아기 그 시대의 예수는 하늘과 땅을 잇는 영광을

위해 신비의 휘장을 벗기고 긴 드레스를 입으시고 승천하셨기에

지금도 제헌하는 것은 비유기에 완성 찾는 길이 아닌가요?

역사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닮은 인물로 천사 닮은 사람들과

우리가 잘 알려진 동화 속의 어린 왕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관문에 천주교 십자가 표시로 남편도 나도 길들어져 있으며

시누이가 올 때마다 이 집에 평화를빕니다. 한답니다.

험악한 세상 지상을 오고 가는 어린 왕자 눈물 마를 새가 없다지요.

여러 계층의 사는 모습에서 양 떼 속에 이리를

골라내는 것도 힘든 일인데 거기에다 천사들이 사는곳에  악마가

설치니 돌아보면 아기 예수는 가장 가난한 어린 왕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서 인간들에게 깨어있으라고

소리치시는데 귀가 무디어 듣지 못하고 아이들만 좋아하시었으니

샘이 나기도 하여 어린이 닮고 싶어요.

소중한 것은 감추어져 있다 어린 왕자의 말 예수님의 생각인가요?

어린아이의 생각으로 느끼라고 상상력을 선물하였고

새 세상에 태어나서 성탄이라고 하는데 구세주보다도

더 정감 가는 예수님은 바로 어린 왕자였습니다.

처참한 죽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있는 어린 왕자

나이가 들면 어른이라 하는데 자식 아닌 적 있었던가요?

품 안의 자식이지만 품 밖을 벗어나면 살아남기 위해 경쟁의

시대에서 세상과 싸우고 어린 왕자를 그리고 있지요.

상상의 꿈으로 빚어낸 어린 시절의 동화 속의 신화

어린 맘에도 어린 왕자를 만나려 공주였으면 하였는데

시대의 문화가 삶이었던 어린 시절 동화책 속에 어린 왕자

길들어진 그 어린 왕자가 많아지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 사막을 찾아가서라도 청순한 마음으로

보석을 담는 어린 왕자를 만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두려움

너희에게 사람 낚는 법을 알려주겠다. 하시었는데

당신의 말씀을 잘못 이용하면서 

사람들을 낚는 게 아니고 잡고 있었습니다.

잡혀가는 것을 모르고 속이는 법을 배웠으니

이미 그들은 잡히었고 사람이 먼저다

사람이 인권인데 사람 위에 누가 군림하는걸까요?

밝히라고 주어진 사법인데 흩어지고 모이는 

그림자는 많지만 뚜렷하게 남기는 것이 없으니 

당신의 비유를 저마다의 생각으로 해석해서

더 두려움을 갖게 하고 수로에 작은 구멍 물이

새어나와 온 땅을 덮듯 실수인지 일부러

그런 건가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고도 믿지 못하니 두려웠습니다.

 

 

평화 지팡이

종교는 벽을 허물고 평화를 위해 하나가 되십시오.

전 세계서 한국만 갈라진 분단의 아픔을 안타까워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유언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자신을 낮추며 교황의 자리는

행세하는 게 아니라 책임이라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도

너희에게 성령을 주노라 하신 주님은 구약의 모세 지팡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해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예수님의 도구 시고 지팡이

살면서 힘든 이에게 너의 지팡이가 되어줄게.

하듯이 지팡이가 많아지면 진정한 자유 평화가 오겠지요
말씀은 비유라 생각대로 해석하며 믿음이라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닮아야 하는데
신앙인이라며 세상에 맞추어 신을 장사하려 하기에

슬퍼지며 햇빛은 크고 작은 이에게 똑같이 비추듯이

반드시 민주의 완성 찾아 뚜벅뚜벅 갈 것이라 믿습니다  

무턱대고 이기려는 기득권이 바이러스 무서운 나라

모든 신이 정리해 주시겠지요.

사람을 사랑하시어 하늘과 땅을 이으시고 아름다운

세상을 잘 관리하라고 주셨건만

내전으로 지상낙원을 헤치면서 기득권들의 차별하는

세상과 싸우고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니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어 부끄럽고 가족의 만남

명절이 거리 두기로 미풍양속도 멀어지네요.

 

  

사람과 블랙환자

하늘과 땅을 이으려 모진 고난으로 십자가를 지셨건만

이렇게 험난하고 당신의 이름을 장사하니 용서하여 주소서.

사람들 사이에 블랙 환자들이 함께 있어 물들어 회색의 

사람이 되어가도 분명한 색으로 보이는 믿음의 세상에 살면 

웅변술에 넘어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나눌 텐데 

그건 바보들이 하는 짓이라 하면서 자리로 행세하며 잘 속여

괴물이 바글바글 아픈 데 약을 주는 하얀 가운 입은 의사가 아니고

치료하는 이가 백의 천사들 귀를 열고 들어보면 완벽한 사람이 없지만

걱정 없는 척하는 이가 있고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거지 뭐

받아들이는 사람 여러 종류의 삶

세상에는 같은 것만 있다면 질리겠지만 여러 가지로

등장해서 편리하면 갖추니까 유행이란 것이 실속으로 바뀌어

편리한 것이 최고로 철 따라 다른 꽃이 피고 지고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 맞추어 내려놓으니 다 누리고 블랙 환자들은 

틀 켜 쥐고 인색을 부르니 사람까지 잃게 되어 공짜 좋아하고

덤을 사랑해서 하나 더하기가 손님을 꼬시어도 미찌는 장사 없다고

유통기간이 남지 않으면 싸구려로 파는데 속는 세상에 살다 보니

덤이 아니면 속는 것 같아요.

작은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만들어 철 따라 나뭇잎이 예쁘게 물들지만

큰 나무로 그늘 찾아 따라갔더니 어둠에 묻혔어요.

사람 사이에도 벽이 있듯이 큰 나무와 숲도 금이 그어져

눈비 맞으면 금은 없어지듯 큰 나무도 오래가면 바람을 못 이기고

쓰러지듯 내 맘에 안 맞으면 이상한 논리로 별걸 다 싸움으로 몰고

가는 버릇 자기 생각이 법이 되어

검은 옷을 입은 환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요?

싹수없는 소식이 뉴스로 전해 지지만 블랙 환자보다는 사람들이

많기에 내일을 점치며 목회자는 하느님대리자

도구가 된 신부님께 양심을 고백하는데 세상의 법은

수사를 받으며 크고 작은 죄인 그곳에도 블랙 환자들이 사는 곳

아주 작은 일로 수사를 받다가도 힘이 없으면 

억울하게 뒤집어쓰듯이 처절해 보이는 당신이 아닌 당당하고 

믿음과 사랑의 십자가 지신 당신을 닮게 하소서. 

겉과 속이 다른 하얀 가운이 아닌 환자를

치료하는 가운을 입은 십자가 되게 하소서

 

 

교무금

오래전 높게만 느껴졌던 성당의 문턱 세상에서

바라보는 그곳은 기대 이하였지만 어딘가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을까 교리를 열심히 받았습니다.

영세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책임감으로 주일미사를

참석하는데 일주일은 빨리 오고 헌금은 아깝기만 하고

교무금은 밀리고 있었습니다.

끝나면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녜 대답하고

성당 문을 나서면 복음 말씀을

잃어버리고 바로 세상과 싸우는 삶의 현실이었어요.

사랑은 용서라고 배웠기에 미운 사람도

그의 좋은 점을 찾으려 하였고 현실의 삶에

집착한 것은 그 안에 살고 있기에 더 그랬나 봐요.

미워지는 마음은 관심이었고 모든 것은

지나가는데 내 맘대로 평가한 것이 부끄러웠으며

신앙은 무엇인지 조금 알아갈때 심하게 휘감은

바람에 일어나지 못하여 교회를 못나가니  그리움의

신앙이 되었는데 하느님을 믿는 동생의 남편 제부

교무금이 밀리면 냉담 하게 된다는

그 말이 옛날 내가 느꼈던 경험담 이었어요.

제부와 여동생 지금은 쉬고있어도 집안은 성가정이고

마음은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교회서 할 일이 많아 귀찮기도 하였지만 어쩌다보니

보잘 것 없는 내가되어 아무것도 할수 없으니 그리움만.

보이는 세상의 인연과 안보이는 상상의 세상에서

희미하지만 경계선이 또렸해지며 마음이 바뀌었나 

교무금이나 헌금이 아깝지 않으며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거라 하셨으니

세상에서 주님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부분을 바치는 것. 

모이는 곳에는 자금이 필요한 것이고 공동체 

운영하는 것도 돈이 있어야  많이 모일수 있으니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이고 교회서부터 공동체와

어울림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세상이 가까워지겠지요. 

 

 

지팡이

힘이 없을 때 도구가 되어 주는 지팡이

율법이 맘에 안 들어 그리스도 길을 가는 예수

하느님 아들이라고 제자들이 따라다니며

사람들이 모이니까 율법 학자라는 바리 사이들

랍비라고 칭송하면서 예수의 출신성분으로 볼 때

자신들보다 남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었고 기득권들의 눈에

가시었던 예수는 나자 렛 출신으로 목수의 아들 

됨됨이를 좋아했고 기득권들의 횡포에 당당하게

맞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모이니 눈에 가시었던 기득권 바르사이들 꼬투리를 찾고

어 거지로 율법을 만들어 그를 십자가에 달았으나

끝 가지 크고 작은 사람은 없다며 공평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 대신했기에 오늘날까지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며 위로자 악한 사람들이 그때의 기득권이

아직도 남아서 예수 이름으로 장사를 하며 십자가에

달리려 하나 봅니다.

그리스도 거룩한 말씀을 믿으라는 것이지 자기들의

세상 이익을 찾아 멋대로 평가하면 예수 님은

땅에서도 십자가를 지게 하는 거지만 안 보이는

성령보다는 보이는 세상일을 사랑하며 나도 모르게

따라가니 처음 맘 그대로 하늘나라를 그리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소서.

어느 누가 공평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홍해 바다를 가른 모세의 기적 지팡이가 신약의

성령이듯이 예수 님은 신약에서 나오지만 전에도

계시었듯이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시면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고

가신다며 하늘나라로 올라갔기에 예수 승천 기념일

주어져 예수 님은 안 보이지만 예수 님의 마음

성령은 세상의 곳곳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백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안 보고도 부모님 사랑을 믿듯이 안 보고

믿는 사람들은 더 행복하다 하신 예수 님의 말씀

성심 성령이 빛과 소금 역할을 하나 봅니다.

생각은 성심을 닮아 보려 하지만 세상은

자리 따라 권한을 주어졌기에 힘없으면 십자가를

지어야 하니 오늘의 시대도 마찬가지

그때의 대사제 원로들이 지금의 기득권들

시대가 변하면서 배고픔에서 유행을 따라가고

자유를 찾는 시대에서 합리적인 법으로

가야 하는데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 유죄가 판치니

주님 당신의 십자가는 실종되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사랑과 용서도 있지만 크고 작은

이가 없고 잘못된 법은 고쳐야 한다고

십자가를 지신 당신은 그리스도교를 믿던

안 믿던 위로의 십자가였는데 퇴색해지는 십자가를

사실로 보듬게 하소서.

악법도 법이라 하지만 양심은 더 가까이 있었고

율법 시대 모세는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해 주었고

신약의 예수는 예언된 하느님의 아들

성령을 주고 가신 모세의 지팡이 안 보여도 성심은

드러나고 훗날에는 사실만 남았습니다.

헌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은 법을 만든 법관들

당신의 법으로 이 땅에 헌법을 지키게 하소서.

모세의 지팡이가 바다를 가르고 사람들을 구했듯이

당신의 성령도 그렇게 하소서.

율법의 모세 두 개의 지팡이 황금 지팡이와

나무 지팡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에는

두 갈래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주님의 성령으로 보낸 나무 지팡이

저희도 나무 지팡이가 되게 하여주소서.

 

부패한 권력자들을 응징하고 정의에 실권을

잡아야 하는 목표지만 쉽지가 않은 것은

부패에 젖어 나 혼자 누리는 부자가 좋아 서기도

하지만 자리로 서열을 가리니 좋아 보여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합류하려는 것은 실권을 잡아야 살기가 편하다는

독재에 젖어있어 그런가? 디지털 시대

4차산업을 가고 있는데 못살던 시대에 젖어

내려놓지 못하니 옛날 사람들은 깨지 못하고 아픈

그 시절을 잊어버렸나?

당대의 실권을 쥐어야 나의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서로의 마음이 다르기에

쉽지가 않고 광야에서 공생하며 힘들게 악령들과

싸워야만 하는 현실에서 그 나라의 권력

1호가 돈이 되어서 돈 있는 곳에는 적폐들의

소굴인데도 들어가니 세상은 돈 앞에서

생명도 흥정하는 세상이 되어가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오늘 죽을 줄 모르고

내일 살 것만 아는 것처럼 언제라도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니 긴가민가할 필요도

없기에 슬픈 일이지만 나면 반드시 죽음의

시간으로 가는 거니까 진리는 거스 리지 못하더라.

아무리 의학이 좋아졌대도 연장은

시킬 수 있으나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구세주뿐 햇빛은 차별 없이

누구의 머리던 똑같이 놀 듯이 삶에서 영혼을

판단하니 그래서 낙타가 천국에 가기에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가 빠르다고 하나 보다.

누군가는 시대를 초월해 묵 여진 사슬에서

풀어주어 세상은 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 무릎 꿇고 멀리 갈 때는 여럿이

가야 빠르기에 저희도 그 대열에 끼어가게 하소서.

 

고맙습니다.

당신은 안 보이지만 성령을 두고 가시었기에 보이지 않아도

성령은 곳곳에서 백의 천사들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분열은 자유로 가는 민주인가? 더러운 목숨을 유지하느니

어차피 한번 죽는 인생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마가 되면서도 생명을 보존하느라

배신하면서 적들에게 쏘아야 할 총부리를 내 편에게

쏘면서 악마의 개 노릇을 하는 이가 있으도

먼 훗날 그 들이 안 보일 때 이름으로 세상은 평가하더라구요.

저마다의 해석하는 생각이 다르다지만

당신을 닮은 마음이라면 성심이니까 신뢰하겠지만

세상 것에 빠져 보이지 않는 당신과 성령은 뒤로 미루고

암울할 때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서 한결같이 기다리고 계시건만

십자가 고상 앞에 얼마나 머리 숙였는지 나에게 따져봅니다.

내가 싫어지고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시 보니 모두가 고마움 감사였습니다.

한때는 당신의 말씀이 부담되어 주일이

빨리 오는 것 같아 헌금이 아까워서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의 흔적인가 모습은 달라졌어도

마음은 당신과의 추억은 늙지 않아

제일 잘한 일은 당신을 부르심에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당신과 함께하는 이 마음

슬픔이 없고 아픔이 없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로 적셔주는 영혼의 안식처도 되겠지요.

 

 

안보이는 당신

당신의 세상과 보이는 세상에서

갈등하는 사람들 양심이 살아있기에 그런가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 양심도 없어 하듯이

선한 양심은 성심이고 저희도 그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당신은 안 보여도 성서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이 안 보이지만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보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랑이 주위에 많다는 것을

말씀에서 믿게 하였습니다.

내가 먼저 있는 그대로의 성심이 전달될 때

그들도 감추어진 속마음이 드러나니까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시고도 이정도야

내 마음이 허락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데

아직 때가 오지 않았는지 나를 섬기는

십자가는 어두움을 반짝이며 쉴 수 없이

많은데 세상은 왜 그리 험악할까?

모세 지팡이는 믿으면서 성령은 필요 한 대로

장사하는지 이 땅에 성령을 보내 백의 천사로

당신의 이름을 알리지만 일게 적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어

미안합니다.

어린이처럼 마음이 보일 때 천국을 본다고

하셨는데 마음을 보이면 이용당하고 찍히나 봐요.

말씀대로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당신을 지우기도 하였으니 당신의 때린 매를

내가 맞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교묘한 방법으로 당신은 야고보한테

마음을 동요시켜 대부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어떻게 대부가 냉담을 할 수 있을까요?

대부라는 직책이 당신과 만남으로 은총을 받고

신부님 수녀님 오실 때마다 현관문

안에서 예수님 들어오십니다.

집안에서 성령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실까? 내가 있는 곳은 컴 앞에 있는데

꼴 보기 싫다고 벤자민 고무나무 아래 쉬실까?

베란다에 내어놓았으니 가고 오는 사람들

쳐다보시니 심심하지 않으시겠지.

당신은 만만해서 사람들 말이 되었고

당신의 기적을 과학으로 풀어 인정하려 하지만

풀지 못하면 하느님이 어딨어.

편리 한데로 밥이 되어 조롱하지만

곳곳에서 당신의 말씀이 법이

되었고 여기저기 퍼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진영 싸움하는 지금 당신이 심판하여

주시고 달콤한 유혹에 빠져 이용당하는

사람들 구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주소서.

저희도 그중에 사람 이게 하소서

 

예수라는 브랜드

당신의 말씀은 해석하는 이의 말이 되지만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이 끝나도

나의 말은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셨으니 유행도 아닌 오랜 세월 당신은

그 자리서 어린아이로 해마다 오시고 해마다

33살 청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순절의 아픔을 이기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부활하고 승천하신 기념일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으니 유명한 책도 베스트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 법인데 성경은 당신의 말씀

복음 가 들에서 당신은 현존으로 거룩한 성서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만찬으로 축제를 가르치셨고

당신의 이름은 물품이 되어 거래가

당신의 현존을 찾아 어린아이로 어른으로

십자가로 다양하게 여러 모습으로

당신이 가신길이 유적지로 남아 관광을 하면서

당신은 세상에서 필요 한대로 우리의 소모품이 되어

당신의 이름을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지만

예수의 이름은 브랜드가 되어

당신을 믿는 이들이 높음을 알리었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움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그러면 모르는 남자는 호랑이인가요

아담이 사람이라면 하와는

생명이듯 남자와 여자는 일심동체

두 마음이면 큰일 나죠.

믿음이 없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여자의 가치를 제일 먼저 올려준 예수님

당신은 한발 앞서가시며 따라오라

어둠에서 헤매지 말라고 빛을 비추고

여자에겐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데

대접해주지 않으니 당신은 여자의 몸을

빌리어 거룩하게 하신 당신

당신의 행적은 주로 여자들의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하고 우물가에서

말을 건네고 여성의 배 안에서 계시었고

죽음의 무덤에서 제일 먼저 여성들이

찾아갔고 또 창녀의 반성을 용서로

어느 집에서 자매와의 이야기

여자의 입지가 살아나니 호랑이 같은 남자는

안 잡고 이건 앞뒤 분간을 못 하고

맘대로 순한 남성들만 꽉 잡아

이리저리 기죽는 것은 순한 남자들

여자들한테 말 잘못 하면 쫓겨나는 세상

미투라는 이름이 여성들을 더 초라하게

만들어 순한 남성만 피해를 보나?

당신이 사랑한 여성은 약한 여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걸 평범을 가르치었는데

남녀 똑같아지라 한 건데 여자들은 목소리가

커지고 왜 남자만 고개 숙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여자들의 모델이며 당신은 남녀

차별하지 말라고 그때 이미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여자가 아픔을 알기에 여자만

누릴 수 있는 모성애를 주었기에 당신을 잃고

아파하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성모님 닮은

세상의 여자였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는 마음도 예뻐야 하고

남편이나 아이들을 존중하는 여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의 문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내 집이고 상점도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오며 먹는 문이 있어 나오는 문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의 집을 문을 못 들어갔나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내가 헬기 신세를 지고 생사를 오고 갈 때도 당신의 문은 안 보였습니다.

어떤 이는 당신을 열심히 믿더니 겨우 사고를 당했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게 열심히 믿었으니 하느님이 받아주었다고 하듯이 두 가지 마음이 나를

심판하기에 아! 바로 가까운 곳에 당신의 문이 있구나.

어둠에 가린 눈이 안 보였는데 그들이 깨우쳐주었습니다.

찾지 못하던 당신의 집 문이 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닫친 문 열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마음도 내 마음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하십시오.

 

어린아이

그날이 그날 같아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시절의 유행 따라가다 보니 지나고 나면 후회가 추억이 되었답니다.

싹이 나면 나무꽃이 피고 잎이 피면 봄 꽃천지 녹색이 짙어가며

단풍으로 물들고 버버리 입고 낙엽 위를 지나면 낭만의 여인

운치 있던 가을은 쓸쓸하게 뒹굴다가 떨고 있는

나뭇잎처럼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만 내 공간이 되었답니다.

시간이 돈이라고 하지만 나의 시간은 세상을 사고도 남지만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양식 과정으로 심판하시는 예수님 세상에서 천국을

맛봐야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아이 닮아야 천국을 갈 수 있다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속이 보이는 철 안 난 어린아이 되고 싶답니다.

엄마한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그 아이는 귀여웠는데

어린아이에서 그때 그 아이를 본답니다.

 

 

자유 의지

속기도 하고 속아주면서 다 이유가 있겠지?

성인군자가 되어가니 흐뭇하기도 했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은 법은 관심이

없었고 삶이 법이었지요.

법치국가 억울한 이가 없으라 헌법이 주어졌는데

안 보이는 예수님 이름을 이용하며 장사하기에 속상하답니다.

희생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살지는 못해도

법보다 위에 계시니 닮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주님의 세상은 그런 날을 만들려고 하늘과 땅을

이으시고 세상에 오시었는데 오래전 그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성탄 전야 기쁜 소식을 알리었는데

세월의 문화가 귀여운 아이 성탄 선물이라 징글벨로 축제의 날

아무려면 어떤가요 기쁜 날을 맘껏 즐기었으면

했는데 지난해는 거리 두기로 거리가 썰렁했으니 이것저것

재지 않는 순수한 어린아이 닮으라고 그래야 나를

볼 수 있다고 하시었으니 어린아이에서 착한 이들에서 예수님을 보았어요.

완전한 종교는 없기에 믿는 대로 느낌이 오고 사는 것이 다르지

틀린 것은 아니기에 그래서 삶은 미완성이고 믿는 대로인가 봅니다.

내일이 불안전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팔에 걸면 팔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배부르면 자유를 부르고 자유는 책임도 따르기에 자유에는

의지가 있어 주님이 사람에게 지어진 자유 의지라 하였습니다.

 

십자가

죽을 때도 살 약은 종교에서는 신이 도우심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벼랑 끝에 빛이 보인다고 하니

보이는 세상과 안 보이는 주님의 세계에서

갈등하다 양심을 지키기도 하지만 손 고락

점이라도 처 본답니다.

믿음이란 것이 브랜드가 되어서 끊을 수 없는

가족에서부터 더러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하지만 나중에 속은 것을 알면 어떤 이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와 아니 그럼 지금까지

속여 왔다고 분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떤

잘못이든 착한 일이던 보고 느끼는 대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고도

네 믿음이 그를 고치었다 그를 살리었다 하시고

나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을 보이면서

너희도 닮아라. 하시었는데 이용만 하지 과연

얼마나 주님의 행적을 닮았을까요?

어두운 밤이면 빨강 십자가는 많은데

세상의 예수님은 어디에 숨었는지요?

컴퓨터 디지털 온라인 그 안에 비유의 말씀

사람들의 저마다 생각은 달라도 거룩한 말씀이기에

성경이라 하였고 아직도 세상은 정확한 것이 없어

안개 속같이 흐린 걸 보니 미완성

완성으로 갈 때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데

갈라진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는 힘든 현실이네요.

 

 

믿음 사랑 공경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에서 성령을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회색빛을 내는 비둘기 몇 마리가

성령이 되어 집을 지켜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지만 저의 이름은 7위 일체

아내 엄마 며느리 할머니 고모 이모 친구

머 크기로 따지면 3위 일체가 세상을 지배하시고

세상은 없어져도 내 말은 남는다고 하셨지요.

말씀을 현실에 맞춰서 따져보면 핵 갈리고

과학으로만 인정받는 현실에서 말씀으로 지어내신

세상이라 그래서 신앙의 신비라는 성가가 배어있네요.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이루어질 때 기적이라고

하는데 기적을 행하시고도 한 번도 네 믿음이 이루어졌다

하신 그리스도님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한다고

하셨듯이 너희도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 속에

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보이는 세상 유혹에 빠져

주기도 안에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말씀이 들어있는데 감히 내 맘대로 행동하고 평가하며

주책을 떨었으니 하느님 죄송합니다.

보이는 현실과 안 보이는 마음이 갈등 속에서

꼭 한 몸이지만 세 위 격을 지닌 삼위일체

유한의 세상에서 무한을 과학으로 풀지 못하니 답은

신비였고 신비는 희망이라 보이지 않기에

언제까지 남아서 모두에게 희망을 품겠지요.

너무 알면 다친다고 그대로 따르라 믿음은 말씀 그대로가

거룩함이니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어야겠죠.

믿음 사랑 공경 다른 말로 해석하면 엄청 많지만

핵심은 이 세 가지만 지키면 율법도 헌법도 다 지키는 것이었어요.

 

 

삼위일체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저마다의 생각과 현실에서 살아가며

배불러 살만하니 안 보이는 천상을

그리며 삼위일체를 풀어보려 하나 봅니다.

삼위는 보이지 않아도 살아감이

삼위일체가 아닌 것이 어디 있나요?

누구의 아버지가 아들 할아버지

엄마의 딸이자 아내고 엄마나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한 몸이 세 위격

그 안에 성령의  이름 역할을 하여주고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의 몸이지만

세 위격을 지녔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느끼는 대로 삼위일체 안 보여도

생각이 세상을 보듯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엄마와 자식 사이에도 성령의 그 안에

존재할 때만 삼위일체가 되는 거지 마음이

흩어지면 성령이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세상에도

아리송한 것이 있지만 알려 안 하고

알이나 닭이나 취향대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지체는 하나지만 위격은

주어진 이름이 숫자가 되는 것처럼

세 위격 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지기도 하지만 삼위일체가 세상에서도

주어진 보편적인 이름이었습니다.

위치를 정하지 않고 둥근 식탁

의자에 앉으신 것은 높고 낮음이 없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림으로지만

보여 주었고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가르치신 것은 먼 날을 내다보는 구세주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거룩한 말씀이라 성경이라 하였고

말씀은 비유기에 생각대로 푼다면

보편적으로 살아감을 평준으로 할 때

미완성으로 살기에 희망을 찾아

사람들이 삼위일체가 되어 세상을 돌게하고

일상의 것들이 성령이 함께 하시기에

편하게 하여주었습니다. 데레사

 

삼위일체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은 사실 어떻게 하면

하늘에 계신 창조주 아버지

이땅에 아기예수로 오신 그리스도

세상에 협력자로 보내주신 성령이

셋이면서 한몸이고 성령의 마음이 하나기에

한몸이면서 셋이기에 삼위일체

나무가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듯이

이세상 살아있는 무엇도 삼위일체가 아닌것은 없어요.

도랑물이 강으로 흘러가고 모여서 바다가 되듯이

두물머리라고 직접 강물을 보았습니다.

남한강 북한강이 만난 두물머리

흘러가서 한강에 모여 큰 강을 이루고

시내의 도랑물이 흘러가서 냇가에서

만나고 삼등분해서 갈러놓으며 샘물을 만들지만

내용은 물이듯이 서로 분리되지 않아

샘이 시내가 아니고 도랑물이 아니듯

성부 성자 를 연결시켜주는 성령 그림에서 보면

비둘기가 성령으로 가운데서 두마음속에

하나로 들어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삼위일체지만 세상에선 삼위일체가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브랜드가 믿음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어느것도 하나가 단일로 된것은 없고

동전도 앞뒤가 달라도 돈이고 숫자나 글도

다르지만 글이듯이  의혹을 가지면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기에 미완성이라하나봅니다.

삼위일체를 왜 알려고 하는지요?

그냥 따르고 닮으면 되는 건데 모든

존재물이 잘 쓰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유한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상을

살아있는 생명들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심판하는 성부 성자  의지대로

가는 마음이 성령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도 현실에서  양심이 안녕하냐고

이풍진 세상을 살며 한알의 씨앗이 되는 것이

삼위일체였습니다.

너무알려고 하지말고 닮으라고 신앙의 

주어지듯이 믿는만큼 얻는다고

좌와자천으로 자기를 알리는 세상에서

한번도 그리스도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네 믿음이 이루어졌다 하시며

내세우지 않았듯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니까 노래로 영화로 생각으로 소설속에

등장하면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꾸미는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다정한 분

말씀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는 세상이

없어져도 한점  한 획도 그대로 남아있다니

우리도 신비의 세계에 갈수있다는

희망이 신앙이 아닌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신적 위격들 삼위일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께 던지는 메세지 서로 함께

그리고  모두 안에서 네가 아닌 나다 라는

공동체안에 들어 있으라고 

성부 성자 아버지 아들 하나의 몸이 마음인

성령이 세위격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구분되어있지만 분리되지 않고

위격은 혼합되지 않는 삼위일체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지만 제가 아는척 한 이야기입니다.lim

 

 

비밀코드

보이지 않는 신의 기적 중계자 나사 고리

이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보내준 것들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름을 편리하게 지었나 봅니다.

내가 급할 때는 기도는 간절함이었고

나의 현실을 위해서 함께 간청할 성모님이

주님과 나와의 연결고리 였습니다.

성당에서는 하느님은 안 보이지만 말씀을

해석해주려 중제자 역할 하는 성직자인 신부님 수녀님.

하느님 나라에 머물라 하셨기에 묵주를 들고서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을 나라에 들어가

성모마리아 하느님  다 생각속에서 만났습니다. 

이곳이 하느님 집이고 내가 그안에 머물고 있었구나

찾는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나와의  거리는

가까운 곳에  있고  내가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물거품이라는 것을 보아왔지만

나에게는 몸이 부서져도 모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고리고 열쇠였기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비밀코드랍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은 비밀번호 가 있듯이

현관문 비밀번호처럼 여기저기 비밀코드가

편하게도 해주지만 주님은 아시겠지요.

저와 주님의 관계는 비밀이 없으니까요.

 

 

도구  

이 세상에서는 하나를 움직이려면

보이는 도구가 있어야 하듯이

나와 풀 사이에 낮이 있고 나와 너 사이를

이어주는 중매 자가 도구이고

냉장고도 너와 내가 있고 반찬이 도구지 않나요?

날마다 보는 텔레비전도 요즘은 리모컨이

도구 역할하고 콩밭 매는 아낙네들도

나와 땅을 이어주는 호미가 도구 아니던가요?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도구에서

손을 데지 못하는 것은나와 주방에서는

칼이 도구였고 깨끗하게 닦아주는 행주가 도구

오늘은 삶은 밤을 까고 있었는데 과도가 도구였습니다.

둘이 한참을 말하다보면 이야기가 도구였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안 보이는 주님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요?

눈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에서 믿음만이

브랜드가 되었는데 비유의 말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요. 진짜 신이 있을까 의혹이

덮어버린 세상에서 안 보이는 내일이라도

준비는 하듯이 말씀은 희망이었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안 보이는 길을 가도 희망을

찾아갈 때 기쁨이 오는 것처럼 성경은

거룩한 말씀이기에 그대로 따르려 하는데

저희 마음은 선과 악으로 옳고 그름이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것은 무책임 아닌가요?

보이는 현실과 안 보이는 마음이 요동치는데

이럴 때는 살아온 날에서 경험했듯이 당장은 달콤한 것이

좋아도 곧 갈증이 오고 원칙은 쓰지만

눈비에 깨끗해지면 사실만 남기에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죽어도 이름만은 남긴다고 하나 봅니다.

그렇지만 묻고 싶어요?

내가 없는 뒤에 이름이 훌륭한들 무슨 소용 있나요?

보잘것없는 엄마로 남겠지요.

현실을 사랑하는 것은 살아있기에 보이는 곳을 먼저

선택했고 성령은 한 가닥 안 보이는 곳에 희망이었습니다.

이중으로 세상도 천국도 둘 다 희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나 봅니다.

소설은 꾸밈이지만 성경은 비유로 잘 써진 말씀

읽는 사람의 해석 하는 대로라면 한자도

꼭 버리지 않게 성경 공부가 있으니 아 그랬구나!

아니면 그래서 어쩌라고?

살면서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름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고치면서

불러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이삭이라고 말씀속에서

족보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야곱 

야곱이 어스럼한 새벽에 누구와 씨름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었습니다.

동이 트니 하느님이 야곱에게 지금부터는

네가 나를 이겼으니  너 서있는곳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하셨기에 지금까지

이스라엘로 부른다는데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말씀속에 들어있는 구절이었어요.

하느님이 야곱에게 지어준 이름 이스라엘

누구시냐고 물으니 내 이름은 <나> 다

하셨는데 인간이 지어드린 이름은 하느님

그 이름은 높이 부름이고 큰 이름이 되었습니다.

쉽게 잊어먹으니 적는것은 잘하지만

그때 뿐 성경 족보는 조금 지나면 생각이 안나고

기억하고 싶은것만  담아놓는 이기적이었습니다.

아픈 날들도 있지만 추억하고 싶은 날들이

오늘을 살게하고 그때그때마다 나에게

지어진 이름은 누구의 엄마지만 성당에서만

불러주는 이름은 데레사랍니다. 

 

 

이름

피렌체 출신 니켈라 젤로 작품 외형적인

모습은 못났지만 그사람의 그림은 신이 담긴 손

비탄 슬픔 조각으로 만들어진 성모가 죽은

예수님을 안은 모상 푸른색의 성모님 색을

내었다면 평화를 상징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죄 속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율법은 기득권들이 편한 대로

만들었기에 고치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만민이 볼수 있는 유럽 성지에 남아서 그의

이름이 유명해졌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로 세상에 오시면서

어머니품에 안겨있는 그리스도 신이기전에

사람의 아들과 엄마 그아픔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그림에는 천상에서 보이는 평화의 예수가

옆이나 앞에서 보는 모습은 고통이라지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지만 내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 그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아이

그날이 그날 같아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시절의 유행 따라가다 보니 지나고 나면 후회가 추억이 되었답니다.

싹이 나면 나무꽃이 피고 잎이 피면 봄 꽃천지 녹색이 짙어가며

단풍으로 물들고 버버리 입고 낙엽 위를 지나면 낭만의 여인

운치 있던 가을은 쓸쓸하게 뒹굴다가 떨고 있는

나뭇잎처럼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만 내 공간이 되었답니다.

시간이 돈이라고 하지만 나의 시간은 세상을 사고도 남지만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양식 과정으로 심판하시는 예수님 세상에서 천국을

맛봐야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아이 닮아야 천국을 갈 수 있다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속이 보이는 철 안 난 어린아이 되고 싶답니다.

엄마한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그 아이는 귀여웠는데

어린아이에서 그때 그 아이를 본답니다.

 

 

십자가

죽을 때도 살 약은 종교에서는 신이 도우심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벼랑 끝에 빛이 보인다고 하니

보이는 세상과 안 보이는 주님의 세계에서

갈등하다 양심을 지키기도 하지만 손 고락

점이라도 처 본답니다.

믿음이란 것이 브랜드가 되어서 끊을 수 없는

가족에서부터 더러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하지만 나중에 속은 것을 알면 어떤 이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와 아니 그럼 지금까지

속여 왔다고 분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떤

잘못이든 착한 일이던 보고 느끼는 대로

그 사람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고도

네 믿음이 그를 고치었다 그를 살리었다 하시고

나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을 보이면서

너희도 닮아라. 하시었는데 이용만 하지 과연

얼마나 주님의 행적을 닮았을까요?

어두운 밤이면 빨강 십자가는 많은데

세상의 예수님은 어디에 숨었는지요?

컴퓨터 디지털 온라인 그 안에 비유의 말씀

사람들의 저마다 생각은 달라도 거룩한 말씀이기에

성경이라 하였고 아직도 세상은 정확한 것이 없어

안개 속같이 흐린 걸 보니 미완성

완성으로 갈 때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데

갈라진 사람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는 힘든 현실이네요.

 

 

믿음

두 사람이 교리를 받는데 한 사람은 개종하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싶어서 덩달아 받았습니다.

개신교는 교리가 없어도 천주교는 교리를 받고 세례가

주어지니 문턱이 더 높기에 큰맘 먹지 않으면

쉽게 넘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개신교에 다니던 사람은 뭐가 뭔지 잘 몰라도 믿음이

있어 교리 받은 것을 중요 한데는 밑줄 치면서 알려고

관심을 보였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평가하면서

관심이 없어 그대로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오셨다지만 믿음이 먼저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믿음이 없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믿음이 깨지면 사랑은 떠나갔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보니 한 사람은 쉬고 개종한 사람은

다시 교리를 받아 부부가 세례받고 잘 다니어

믿음이 중독되어서 그 친구는 자매가 되었답니다

 

 

만남

어릴 때 친구 집에 갔는데 벽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발견하고 너무 처참해서 저런 교회는

안 다녀야지 속으로 마음을 가졌는데 어쩌다 보니

엄마가 의지하러 다닌 곳이 공소이며 주님 계신 곳이었습니다.

아마 주님이라면 힘든 고민을 다 풀어줄 구세주라고

믿고 주님을 알아 갈려고 최선을 다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엄마의 마음은 잘 몰라도 완전히 주님에게 빠졌는지

아니면 교회에 빠졌는지 교회로 인도한 사람을 믿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주님의 부르심이었으며

엄마가 성당의 다닌다는 게 자랑스러웠습니다

보이는 세상과 안 보이는 말씀에서 갈등하며 한 번도

주님을 믿으라 권하지는 않았으니 엄마는 그때도 언젠가는

주님이 부르시기를 기다리었나 봅니다.

내 여동생은 세례받았지만 나는 엄마와 떨어져

기회가 없었는데 결혼 날짜를 잡고 내 남동생을 보레영세

시킨다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공소에 갔는데 따라갔습니다.

훤하고 멋있는 젊은 신부님 왜 결혼도 안 하는 신부가 되었지

주님의 꼬임에 빠졌구나.

멋대로 생각하고 엄마 딸로서 잘 보이려 했나?

아니면 내숭이었나 나도 그때 그 애를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얼마 안 있으면 대천으로 시집간다고 하니 반갑다고

바지씨 하고 성당에 나오라고 해서 대답했는데

그 후로 까마득히 그 신부님과 약속은 잊어버리고

몇 분의 신부님이 자리를 바꾸고 나서 교리 받으러 성당 문턱을

넘던 날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나는 완전히 천상의 사람이구나.

나의 생활을 청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만나는 기대가 컸습니다.

천상이 마음이라면 보이는 현실의 세상에서 늘 갈등하며 주님이

귀찮지만 주님의 지어주신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책임으로

다니면서 바라는 나의 기도는 감사와 고마움을 모르고 상황에 대한

그때의 욕심이었습니다

성모 승천 날 새로 태어나고 그 더운 여름 아이들 둘 데리고

유아 영세를 시켰기에 그 후로 하나하나 주님의 사람 되어

저희 가정은 성가정이 되었으니 주님의 부르심은 참 오묘하였습니다.

 

 

생명의 빵

사흘 굶고 담 안 뛰어넘는 이 없다고 하고 겨울이면 감옥에서

얻어먹으려고 빵을 훔치고 붙잡혀 들어간다니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요?

먹는 것이 해결되었다 해도 먹어야 사는 몸 구조로 되어 있으니

빵을 먹고도 만족 하는 사람이 있고 고기를 먹어도 불행한 이가 있는 것은

상황에 따라 생각이 있고 생각 속에 삶이 있으니 마음먹기 달렸다고

이 세상은 생명의 뿌리를 따나 살 수 없듯이 먹는 것을 우선으로 구약에

그리스도 제자들에서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알을 따먹는 것도 허기를 달래주는

생명의 양식 법보다도 생명이 먼저니까 물고기 두 마리 방 다섯 개

들고 온 사람은 아이였고 아이의 속이 보이는 순수

기적을 행하시고도 어린이 같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적용된답니다.

빵은 생명을 이어주는 밥이고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생명의 빵

영혼의 양식인 빵 지금은 쌀 빵으로 제과점에서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도 빵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배 불리는 빵이었지만 빵 안에 영혼의

양식이 되기에 이 빵은 생명만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영혼까지 살리고 있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의 기적은 어린이 마음으로

내어주신 생명의 빵은 모이는 곳에서 만찬이 되게 하소서.

 

생명의 빵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여기서는 너무 멀고 마르지 않는 샘은

깊을수록 많은 물을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빵이라 하지만 배 불리는 빵일 뿐 자기의 취향대로

브랜드가 되어 밀가루와 쌀로 만들어진 밀 쌀 빵이라 한답니다.

성경은 전해온 말로 옮겼지만 거룩한 말씀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것은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선을 그은 것이 아니라 구약이 없이 신약은 있을 수 없다지요.

구약은 유럽의 역사라 해도 믿는 마음은 하나인데 해석을

자기들이 입맛대로 하니 말이 신앙이 되어 전 세계서도 성직자들이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지금은 토정비결이나 점으로 예언하지만

사람들은 점은 무당이라고 뒤떨어진 사람 같으니 숨긴답니다.

구약에서 모세의 예언도 신약에서 시몬 베드로의 예언 다 맞지만

시대의 흐름 따라 정리하려 하지만 성경은 신비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 한치도 안되는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도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만나가 빵이 되어 간식도 되고 배고픔을 달래주는 밥이었습니다.

2 천년이 지난 오늘날 당신의 말씀이 양식으로 배부르게 하소서.

 

 

생명의 빵

율법을 어기었다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세상에서

또 한 번 지어드리는 것 같아요.

잘못된 율법보다 인권을 먼저 생각하신 주님의 법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안식일 날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것이 죄가 되었으니 지금의 법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밀밭 옆을 지나가며 풍성하게 열린 밀을 따 먹던 예수님 제자들

배고파 빵 한 개만 훔쳤어도 감옥행 겨울이면 일부러 빵을

훔쳐먹고 감옥에 가려고 한다니 슬픈 일이죠.

사랑과 용서가 없는 수백 가지 율법을 만들어놓고

기득권들이 행세하니 그때도 예수님이 출신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유명한 바리 사이라면 처참한 죄인은 아니었겠죠?

법 없이도 사는 착한 사마리아인 율법은 어긋나도

생명을 먼저 생각하신 구세주와 사마리아인

빵이 되어 생명을 구하고 영혼의 양식되신 구세주 십자가의

고개 숙인 겸손과 다 내어주는 양손 부모가 자식에게 회생하듯이

사랑은 회생과 믿음이라고 주일마다 미사로 드리는 이 예식

전 세계서 주님을 만민의 왕으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많은 먹을 거에서 생명의 빵을 선택하시고 미사 때마다

빵으로 오시는데 보이지 않으나 거룩한 말씀이 있어 그리스도인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렵니다.

생명을 영하기에 현실에서도 영혼도 배부르기에 고맙습니다.

 

 

당신의 가을

보이는 곳이 당신의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철 따라 저희에게 감동을 주시는 데 느끼지 못하고

나의 이익만 찾으며 조건을 사랑하였습니다.

어떻게 가을 닮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물질로 해결되는 시대에서 어떻게

마음이 가난 하라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나요?

당신은 부자 보러 가지고 있는 것 다 내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니 부자는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질 만능 시대 당신의 법은 때리는 대로

맞아야 하고 힘없이 진리를 부르짖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한테 바래는 것 같습니다.

내 가족은 극 열에 뛰어들지 말라 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서만 따라가라 하는 것은

진리를 외면할 수 없지만 다치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딸내미가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하며 시위하는데

불안해서 안 했으면 했는데 그 애도 가정을

가지니 저희 자식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라 하대요.

다 그런가 봅니다. 내 주변에는 안정을 찾고

누군가 회생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고 세상이

숨을 쉰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것은

당신을 따르면 아프니까 가기 싫어 선가 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지어내신 당신이지만

크신 분이 비참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허무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제자들은 보았다고 복음에 나왔습니다.

당신을 대천사라고 믿는 종교 통곡 바위에

머리를 대고 구세주 빨리 오라 운다니까

아마 성경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니 그런가요?

어떤 말이 진짜인지 몰라도 성경 말씀은 당신은

옳은 일에 목숨을 바치고 하늘과 땅을 이으시며

성령을 주고 가노라 하셨으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나라도 관리하시니 선의에 욕심쟁이십니다.

그때를 본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성경의 말씀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너희도 그렇게 하라 하시지만 아마

본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 보고 당신의 말씀을

자기들이 판단해서 이익을 찾아 장사하고 있으니

당신은 위대하지만 작은 사람으로 모두의 주님이었습니다

크고 까다로우면 사람이 안 따르지만 작고 만만하신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보이는 순수를 가져야

하늘나라를 갈 수 있다 하셨지만 철없다 깜 본 답니다

어릴 때부터 싸워 이기는 것을 배우고 온라인 유투 부에서도 게임

어른도 이겨야 기분이 나니 아이들은 더할 것 같아요.

당신은 작은 사람이지만 믿는 이들이 크게 만들어 드렸으니

언제까지고 당신의 이름은 남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자기를 돌아보며 정화하면서 당신 세상이

되는 그날이 오면 사방에서 철 따라 꽃이 피겠지요

꽃을 볼때마다 당신의 꽃으로 보게하소서.

 

 

백양사 단풍 잎새

고운 옷 준비 안 했는데 어떻하지?

급해지는 잎새들 위에서 아래로 물들기

시작하여 가을 산이 지금부터 시작이래요.

얼마나 더 아름다움을 보이려 단장할는지

아직 못다 핀 잎새들은 찬 이슬 앉고

목욕하는데 성질급한 잎새들만 붉게 물들어

설악산 단풍이 시작되면 덩달아 백양사도

급하다고 얘기 단풍이 사람들 부르겠지요.

눈을 감고 가만히 컴 앞에 앉자 노라면

내 어깨는 양 날개가 단풍 구경을 하려고

날다가 백양사 산길에 내려오니

숲이 놀라서  단풍잎 하나 어깨에 앉아습니다.

그 단풍잎이 주님의 이파리인가요?

그랬으면 내 호주머니에 당신을 담고싶어요

내가 가는곳마다 함께 하여주시라고 나의 방패가 되어주세요..

컴 앞에서 주님의 백양사 단풍잎을 그려봅니다.

 

 

 

이치

나는 모르겠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는 물결인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단풍에서 가을이 보이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피어나는 봄이 보이고

폭풍이 몰아치면 설산이 되어 하얀 옷 입히듯이

세상은 추위도 더위도 똑같이 견디라 하는데

사람들이 공평이 싫어서 저 혼자만 특별해야

식성이 풀리니 세상은 앞으로 가지만 뒤로 가는 길이

익숙한 것은 뒤에서 불을 비취어주나?

넘어지지 않고 잘 가며 더 가관인 것은 터진 입이라고

독설하는 걸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진국은 사람들의 만드는데 서로가 자신의 말이

옳다며 누구를 가르치려 하지만 내가 변하여 정의롭게

바뀌어 갈 때 꽃피는 세상이 오겠지요.

말만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한다고 하지만 

저들은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맨날 싸움하니

가꾸고 지키라는 세상 잘 관리하면 이쁜 꽃이 피겠지요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더 예쁘다고

법륜스님이 말한 것처럼  철따라 봄꽃피게 하소서. 

 

 

풍랑

인생의 풍랑 속에서 새로운 나를 보았습니다.

사랑이 있었기에 나를 살리었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말씀에 그 모습이 현실에서는 배를 비유해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에서 어찌 풍랑이 없고

잔잔하기만 하겠나요?

배에서 풍랑을 맞으면서도 헤쳐나가야 하고 풍랑을

맞는 사람들 물 위를 걷는 예수님 불완전에서는

비유지만 의심하면서도 완전을 향해서 가고싶었습니다.

믿는 사랑은 두려움이 없듯이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

구렁에서 손잡아 준 사람이 나의남편 그들에서 주님이

보였고 내가 처한  현실은 처참하였습니다.

삶이 힘들어도 고마운 날이 많았고 바람이 불어도 지나가면

잔잔하였는데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 풍랑을 만나

헤쳐나오지 못했어도 예수님은 풍랑 속에 바람아! 멈추어라?

하니 잔잔하였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풍랑 속에 물 위를 걷지는 않으니

어려울 때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내 인생에 풍랑을 막아주는 나침판이 되어주시었고

어두움에 풍랑을 맞은 나에게 등대가 되어주시는 그분이었습니다.

나의 생명을 일어나라 손잡아 주신 분인데 나의 현실에서

원망만 하였으니 안 보이면 잊는다는 말처럼 주님은 보이시지

않으니 잊은 분이었다가 다시 불러주어 대답하였습니다.

십자가 성당 옆을 지나가노라면 저곳이 주님의 집이구나

그리운 집이 되었고 남편도 덩달아 주님을 멀리하더니 우연한

계기로 대부를 서고 나서 어떻게 대부가 냉담할 수 있냐고

주님 집을 찾으니 저도 반은 성당에 나가는 것 같습니다.

미사 보고 집에 오면 주님 향기를 묻혀와서 집안에 꽃향기가

가득하고 신부님 수녀님 오실 때면 예수님 오십니다.

하시니 저희 집안은 그리스도 향기가 가득하답니다.

사납게 불어 닥친 풍랑도 잔잔한 봄바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십자가

내일이 안 보이니 주어진 십자가는 짊어져야 할 수밖에.

무거워서 피해가고 싶은 고통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십자가를 져라. 하셨듯이

십자가는 누가 지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이래저래 생각하다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고통에 짓눌리는 십자가라고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업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의 무거운 십자간 줄 알고 한참을 지고 가니 가벼운

십자가 나를 감싸주는 그분이었습니다.

남이 볼 때는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웃는 것을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본인의 십자가는 향기 나는 꽃나무였습니다.

그분의 향기는 하루하루 지나는 대로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기꺼이 지는 것이라면 지겠습니다.

날 수 있는 날개는 부러졌어도 주님의 십자가를 달겠습니다.

날개 달은 천사가 되고 싶으니 천심이게 하여주소서.

보이는 세상에 현혹되어 생각만 화려하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부질없는 생각이 고통을 만들었고 육신은 유한하기에

썩어 없어 지지만 영혼은 무한하고 하루가 천년이라고 하니

의심하지 말자고 세상은 저의 생각대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이 경계선 하나 가까운 하나였습니다.

세상은 소유를 따르게 하지만 그 이유는 집착해서 생각이

묶여있기 때문에 욕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현실이니 순간적인 삶에 매달려 썩어 없어질 육신의 나라

예언자의 말씀이 오늘날도 이어지니 그대로 믿으렵니다.

과학으로 온라인 시대 브랜드가 믿게 하는 시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은 과학으로는 말도 안 되니 신비라 하고

세상은 끝나도 말씀은 한 획도 안 없어진다고 하였으니

영혼은 존재를 위해서 그분을 닮아야 하고

비유니까 미완성이라 언제까지 남을 것이겠지요.

 

이야기

삶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만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유리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리를 가노라면 보이는 것이 유리

색이 다른 유리 남방도 되고 두께도 달라지는 유리

낮은 건물이나 높은 빌딩이나 유리 없이 안과 밖을 볼 수

없으니 유리는 일상이 하늘이고 땅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유리만 보인다고 하는 것이 이해 가는 것은

돌 장사를 하는 사람은 여행을 가면 묘지에 비석만 보고

저것은 몆 자 짜리라고 하니 직업은 못 속인다고 보이는 것이

비석만 보인다는데 요즘은 아파트나 공원이나 모양을 낸

돌이 위치를 반짝이게 해주고 천 태 만상으로 돋보이게 했습니다

출판사에 다니는 이는 책만 보인다고 하고 영화를 찍는 이는

작품을 보는데 우리는 배우 이름은 알아도 감독의 이름은

기억 못 하지요.

한때의 며느리고 아내고 엄마였는데 지금은 제일 윗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장모가 되었어도 요즘 애들과 통하려면

시대를 읽어야 하니 그리고 취미가 책 읽는 것 소설과

에세이 역사나 근대사든 다 현실에 맞추어 재밌게 보는데

그중에 감탄하는 것은 소설

에세이나 역사는 시대의 일기지만 소설은 그럴듯하게

공감 가게 꾸며야 하니 진짜 작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방송에서 말도 안 되지만 웃게 만든 것도 다 소설이고 꾸밈

말이 되고 공감 가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이 만나면 서로 다른 실체지만 할머니는 집순이라 하면

손녀는 밥순이라 해서 웃고 개그를 해야 웃고 재밌었습니다.

철 따라 자연이 변한다면 우리의 자연은 겨울이지만

마음은 꽃피었던 청춘이라 젊은 날 추억이 오늘을 살게 하기에

나이는 숫자의 불과 한 것.

옛날 우리 때와 요즘 애들의 시대는 흉도 되지만

배워야 현실이 편하고 우리 때는 옳은 소리 하면 바른말

한다며 어른한테 앙아린다고 했지만 지금 그런 말

했다가는 상종도 안 할 것이기에 마지막 효도했고 첫 번째

버림받는 시대 어른 입장보다는 애들 세상이 좋았는데

그때는 모르고 원망만 했어도 이것이

사는 이야기고 삶을 만들어 가는 대로 이야기만 남기었어요.

 

 

이야기

나눔에 이야기 지나고 보면 이야기를 만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양심가는 대로 움직이지만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서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시는데 철없이 구는 것은

이해하셔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을 속상해하며 슬퍼하시겠지요.

저의 생각이 가장 그분을 닮았을 때

그 마음을 알 수 있듯이 그분은 화려한 곳에

머무시는 곳이 아니라 구차해도 거룩한 곳이

집이기에 안 보여도 그곳에 계시기에 하느님 닮은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쓰레기장에 내어놓기 아까워서 망설이는데

누군가는 그 물건이 필요하기도 하니 버린다 생각

하지 말라 하였고 필요한 그 물건을 재활용 장소에서

구했으니 나눔은 바로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야기

도토리는 다람쥐의 겨울 양식이라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묵 쑤어 먹기 위해 가을이면 줍는데

다람쥐는 머리가 모자라서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니까 여기저기 묻는다고 그래야 겨울에

찾아 먹을 수 있다 하는데 그 사람의 생각이고

다람쥐 머리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약다고

하지만 머리만 모자라는 건가?

어떤 이는 일부러 안 찾으면 도토리에서 싹이 나와

나무로 커서 다람쥐의 집을 지켜주고 생명이

자라니까 다람쥐는 초원에서 논다고 사람의

마음이 다람쥐에서 보이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일상의 생활 성경의 말씀도 요점만 써 놓았지만

해석하기 따라 다르니 전설도 이야기고 비유.

이렇게 다람쥐는 도토리 하나에도 먼 날을

기약하며 나무를 키우지는 못해도

그 나무가 클 수 있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아까워서 필요 없어도 끓이고 있으니

다람 쥐 채 바퀴 돌린다 해서 자동차 바퀴만

보아도 다람쥐가 보여 닮고 싶었으니 옛날이나

현실도 사는 것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

이야기를 누가 해석하느냐에 달라도

요점이 같은 거룩한 말씀이었답니다.

울타리와 양념 주님의 얼굴이 내 맘이

있다면 주님을 만날 때 남편하고

나이가 같았는데 남편은 늙었고 주님은

지금도 33세 청년 말씀이 비유라고

너희 생각대로 해석하라 하시지만 보이는

현실의 세상에서 말이 안 되지만 이유를

달지 말라 하시었으니 말씀은 믿음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산다는 것은 도둑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든든하며  맛을 내기 위해선 양념이 필요.

아들이 울타리라면 딸은 양념이겠지요.

아들과 딸이 꼭 필요한 세상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들도 신부님 수녀님

여자의 몸에서 나셨고 전능하신 주님도

여자의 몸에서 나셨으니 이해할 수 없어요.

세상은 남자와 여자 아들과 딸로 이루셨으니

아담을 사람이라 부르고 하와는 생명

사람에 생명이 없으면 죽음이라 말씀하시고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시었으니 저희는 주님의 뜻이 핵 갈리어

아는 체는 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선물이신 아들과 딸이 이 땅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 할아버지도 되고

아들이 없으면 외로운 것인데 딸이 영역이

넓어지면서 딸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진답니다.

주님은 울타리도 되시고 양념도 되시듯

보이는 저의 세계서는 혼밥혼술이 안 되려

저는 어쩌다 안주와 찬이 되었는데 술잔에

길게 파마 머리하신 멋있는 주님의 얼굴이 담겼어요.

파마가 유행하는 지금 주님께서도

멋을 내고 싶은거지요?

파마 머리에도 거룩함이 보였습니다.

 

예언

잘못은 고치라고 있는 것이고 밝음은

어둘수록 빛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묵주를 돌리면서 유튜브로 강론을 듣다 보니

손은 묵주 알을 돌리면서 귀는 성경의

말씀이 이야기되어 듣고 있었습니다.

핸드폰 영상을 조용히 나 혼자 들으려 이불을

덮었더니 환하게 빛이 어둠을 비추어

밝음은 어둠을 이긴다고 직접 내가

말씀이 자장가도 되어주고 익숙해지니 성경이

잘 안 보여 멀리하였는데 디지털

세상에서 온라인으로 유튜브를 들을 수

있는 시대기에 고맙습니다

텔레비전의 안태나가 성경의 바벨탑이었고

성경의 예언자들이 오늘날 무당이 아닌가요?

하루가 무섭게 바뀌는 현실에서

이천 년 전 기록된 성경의 말씀은

전설이고 비유가 되었지만 확실하지 않기에

믿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니

언제까지고 남을 것이고 저희도 들을수록 재미있답니다.

 

땅의 숨결 이렇게 보드라운데 왜 그리 험한 길을

달려왔는지 하늘이 안 보였나 넘어지고 말았으니

밟고 가는 것이 땅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하늘길

짓눌린 삶에서 해방은 얽매인 삶을 풀어갈 때

독립이라 하였나요?

거친 삶에서 쉬어가라 하였는지 아주 저를

잊어버리시었는지 일으킬 생각 안 하시고 내 안의

주님은 깊이 주무시나 봅니다.

얼마나 오래 날개를 접고 있어야 펼 수 있는지요?

 

 

종교개혁

마리틴 루터 개혁이란 희생 없이 힘든 것은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기에 해석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며 정의는 무기가 없으니

힘들었지만 처음 맘 그대로 마리틴 루터의 신앙은 지금

이대로 가면 실패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지은 죄를 돈을 내면 면죄부를 주는 것은 현실을

따라가는 잘못된 법이었기에 종교개혁을 한다고

한 청년 루터 신부였지만 결국은 그를 따르는 교회들이

자기들만의 이상한 해석을 하여서 중세기에

타락했던 천주교를 따라가며 하느님의 세상을

더럽히고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부패 되어갑니다.

그래도 주님닮은 이들이 있기에 개신교도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집도 되겠지요.

새 하늘 새 아침이라고 새롭게 전교하며 거룩하게

모이는 곳이 성당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며 도구가 되어가는데 악령들이 제동을 거니

우리의 기도는 얽매인 것을 풀어주어 어둠에서

밝게 하시고 잘못된 종교의 법은 반성하여 거룩한

말씀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 순종과 인권을

사랑하고 정의를 따라가게 하소서.

 

공동체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돈이 있어야 하지요.

처음 생각엔 회비가 아까운 것 같아도

익숙해지다 보면 앞장서게 되며 자랑스러워져요.

공동체는 하느님이 주신 인권의 사랑과 믿음.

교회 가야 한다는 주님의 날이 의무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몸을 이끌었습니다.

생각하면 연인들이 그 집 앞에 가까이

갈수록 사랑이 샘솟고 문 앞에서 기다리어도

지루한 줄 모르는 마음은 사랑이었습니다.

교회 앞에만 가도 하느님이 보이는 듯 거룩한 곳.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며 살리라 지날 때마다

마음은 그곳에서 성가를 부른답니다.

믿음으로 여러 단체를 만나게 하여 주시고

회비가 있지만 적은 돈 가지고 큰 사랑을

얻은 것이고 공동체를 잘 이끌어가는

이는 사람을 사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공동체 집안의 공동체 이끌어 가며

희생이 백배의 기쁨을 주었기에 실속을

따지는 현실에서 사람을 얻는 만큼 큰 소득은

없더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사랑의 공동체에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갔으면 합니다.

공동체는 자신의 몸과 마음 희생이 따르지만

큰 소독은 가족의 공동체를 가르치고 이루는

것이었으니 주님 생각을 풍성하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개신교에 다니는 막내 시누이가 가까운 거리에 살기에

한 번씩 들려주어 세상 소식을 전해주고 동네 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재밌고 잘 통하는 사이랍니다

거리 두기로 명절이지만 애들이 둘씩 명절 전에 다녀갔고

막내 시누이가 자주 들리는데 격리가 되어서 올 명절은

쓸쓸하였는데 시집간 조카딸이 방문해주어 반은 명절 기분 났습니다.

사람 냄새가 점점 그리워지고 온라인으로 동영상이 명절에는

공짜라 세배를 받았습니다. 외상으로 ㅎ

손주들 세뱃돈은 아깝지 않고 구정에는 이래저래 돈이 많이 나갑니다.

막내 시누이 격리가 풀려서 어제 만났고 격리된 이유를 알리었는데

참 기가 막혀서 안 보이는 주님의 개신교나 천주교나

한 분이시지만 가까이 보이는 시누이 동네 친한 이들

내 가족이 주님이기에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닮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개신교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색이 뚜렷하면

쉽게 맞출 수 있는데 말씀으로 천지 창조하셨으니

거룩한 분인데 긴가민가 핵 갈리게 하고

감을 잡지 못하니 그러기에 생각이 갈라지며 한 신을

섬기면서도 틀린 생각이 아니고 해석하는 마음이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말씀이지만 비유니까 과학의 시대를 살면서

성경은 전설이 되었으니 재밌게 옛날이야기

정확하게 하면 하나도 재미가 없으니 양념을

넣어야 재미가 있고 사실 인지 아닌지

평가는 자기가 하지만 거룩한 말씀이고 오늘날에도

그때의 예언자 들의 말이 성립되고 있으니

안 보이는 세상이 희망이고 미래기에 교회를

나가고 현실에서 고마움 감사를 느껴야 천국을

갈 수 있다고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판결하시는 주님 지나간 어제를

아쉬워하기보다는 내일 무얼 할까 하라

하였지만 어제가 내일의 과거이고

밑거름되니 어제를 토대로 삼아 내일을

짐작하는 것 아닐까요?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다들 그렇게

믿기에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

보이는 세상일도 잘 모르는데

안 보이는 세상일을 더 정말 모르겠습니다.

나무는 하루가 가는 대로 열매 맺는 시간이

가까이 오지만 사람은 죽음이 기다린다지요.

유한은 기간이 있어도 주님의 세상은

무한이니 생명이 끝나면 죽음이라고 하지만

주님의 세상은 무한하다 하니 믿는

저희는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겠지요.

자기 종교가 제일이라지만 얼마만큼 그분을

닮는 것인지 그분의 행적을 믿고 따르는지

과정만 보시기에 주님은 참 공평하시고

천주교나 개신교든 그분 닮아 가는 사람이

참 신앙인 해석하기에 다르다고 해도

거룩한 말씀을 따라는 이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표징

46 동안 지은 성전

유대인들이 의심하니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흘 만에 내가 지을 테니까 그것이 나의 표징이다.

어디까지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무조건

거룩한 성경 말씀을 믿으라 하지만 현실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으며 이용당하니 눈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에서 의심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표징을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으니 확실한 증거는

녹음이나 영상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 만나는 곳이었고 거룩한 성당.

표징을 찾으려고 거룩한 곳에 가서 의심한다면

비유가 답을 말해주니 지금까지도 거룩한 말씀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으라 하시었기에 저마다

생각대로 설명하니 여러 생각이 답은 하나였습니다.

표징을 보여주고도 믿지 않으니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하느님 집을 짓겠다 하셨으니

하느님 머무시는 곳 그곳이 거룩한 성당이었고

표징이었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속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속지 않으려 의심하는 것을

하느님의 기적을 과학으로 풀다 못 푸니 신비라 하고

살면서 신화적인 자기를 보는 것이 표징이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니

고마움 감사를 해야 하고 표징은 의심하다 보면

꼬리가 꼬리를 물고가면서 이해할 수 없기에

포기하기에 그래서 표징은 비유가 문제를 풀어주었습니다.

 

구약이 율법의 시대라면 신약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사랑의 믿음을 택하지 않았나요.

구약 없이 신약이 없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로

한 신이지만 사람으로 하늘과 땅을 이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었는데 그대로를 믿으면 예수쟁이가 되고

안보이니 불신을 한답니다.

예수님이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나오면서

진리의 길을 가시며 따라오라 하시는데 보이는

세상 것에 마음을 팔며 성경은 역사의 전설이 되었네요.

비유라 해도 거룩한 말씀이고 정의가 불의를 쫓아내니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었으면 합니다.

성인들은 안 보았지만 거룩한 분들이니 믿음은 닮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들어

관리하라 하였는데 지키지 못하고 악성 바이러스와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저희 간절한 기도는 바이러스에서

해방되어 사는 것이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는

늦었기에 새로운 세상에 사는 길을 알려주세요.

사순절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이 맞듯이

비록 지금 힘들어도 부활에는 코로나 19도 퇴치되어

꽃을 보게 해주세요.

시대 따라 법이 다르다 해도 주님의 법은 공평이고 진리.

법은 공정하게 지키고 판단할 때 법이듯이

예수님 시대에도 잘못된 율법을 공정으로 고치려다

십자가를 지셨듯이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른 것은

없어도 진리와 공평으로 억울한 이가 없게 해주세요.

 

 

여자

성경에는 역사 속에서 주님을 절실하게

보필하며 따른 사람들은 제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었고 마지막 영원에서

생명을 이어주는 제자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앞장서서 가신 주님은

저희 선구자였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일은 인권의 평등을 우선으로

여자 남자 약자 강자 모두가 평등하게

삼으시고 가진 것을 나누시는 합리적인 예수님

부활이 없다면 사순시기는 의미가 없다지만

세상 모든 것은 준비 없는 성공은 없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 땀 흘리고 매를 맞으며 처참해도

정의를 위해서는 참고 견디면 처음엔

바보라고 비웃음을 받아도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었습니다.

비록 슬픈 사순절이지만 생명을 주는

부활이 기다리니 슬프지만 웃어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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